섭식장애 이야기 1
내가 많이 아팠나 보다. 그러니 태어나서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열이 나고 울고 토했겠지. 요즘말로 하자면 말 그대로 뼈만 앙상한 뼈 말라, 개 말라 인간이었다. 그 당시 병명은 백일해라고 했다.
기침과 고열은 툭하면 찾아왔고 습관성 폐렴으로 시도 때도 없이 아파서 울어댔고 툭하면 토를 했다. 그래서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은 나를 움보라고 불렀다.
“엠뱅하드랑갑네. 아픈 것도 서런디 움보라고 부르믄 쓰겄소? 조은일에 움보라고 부르덜 말랑깨!!!.”
만례씨는 나를 움보라고 부르는 동네분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병원을 문지방이 닳도록 수시로 다니긴 했지만 하루하루 나는 조금씩 살이 붙고 키가 조금씩 커 나갔다.
비록 다른 아이들 어깨춤까지 밖에 키가 못 쫓아가긴 했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아파서 아버지 등에 업혀 등교하는 일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래도 아프면 좋았다. 다른 마을에 살고 있는 아빠가 업어서 등교를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없는 것 같다고 수군거리는 아이들에게 아빠 등에 업혀오는 날이 나에게는 뿌듯한 날이었다.
그 시절 학교가 끝나면 동네 아이들은 논이며, 밭이며 저녁밥을 먹기 전까지 온 동네를 휩쓸고 다녔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대부분 집은 비어있었다.
만례씨는 그렇지 않아도 철대처럼 말랐는데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겠다고 그만저만 쏘다니라고 야단이었다. 아이들과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고 싫었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는 건 더 싫었었나 보다. 맨 뒤에서 터덜거리며 쫓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할머이 내 더는 못 묵겠다이.”
“아따매 한 수꾸락만 더 묵고 가란말이다잉. 고까지 꺼 묵고 어쩌코롬 산다냐잉.”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해 아침을 물에 말아먹거나 날계란에 간장을 비벼 겨우 몇 숟가락 먹고 학교에 가면 점심은 거의 남기고 하교 후 3~4시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참을 수 없는 허기짐이 몰려왔다.
밭일을 하러 가신 만례씨는 늘 교자상에 옥수수, 감자, 고구마, 계란을 삶아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고 밭일을 나가셨는데 혼자 먹기는 싫었었나 보다. 저녁밥때까지 만례씨를 기다리다가 배고프고 지쳐서 초저녁이면 잠이 들곤 했다.
나는 점점 다시 말라갔다. 그 시절 나에게 갈비씨, 까시라는 또 다른 별명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