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별로라서 세상이 살짝 비뚤어져 보이는 날 말입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회의에서는 말꼬리가 자꾸 틀어지고, 메신저 알람은 모두 나를 귀찮게 하고, 누군가는 또 엉뚱한 헛소리를 던집니다. 그럴 때면 문득 생각합니다.
“하… 사람은 왜 이렇게 별로일까?”
이 연재는 그 마음의 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별로인 사람들, 곤란한 사람들, 조직 안에서 우리를 삐걱이게 만드는 크고 작은 빌런들.
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어떤 공통된 패턴이 보이지 않을까, 그들의 심리 기제를 한 번쯤 제대로 각잡고 해부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부터 써야 하지?’ 할 정도로 소재가 넘쳐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쉬웠습니다. 조금만 들여다봐도 금방 “아… 별로네”라는 감상이 솟구치니까요.
그렇게 주변의 빌런들을 차례로 기록해 가던 중, 유독 한 사람 앞에 시선이 멈춰섰습니다. 익숙함인지, 불편함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먼저 올라오는 인물. 결국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연재를 끝낼 수 없겠다고 느낀 인물 H. <사람은 왜 별로일까> 연재글의 마지막 빌런입니다.
공룡처럼 일을 삼키는 싸가지 빌런 H
H는 일을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그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업무가 오면 “아, 이거 제가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긍정 회로가 자동 재생되며, 공룡처럼 덥석 일감을 삼켜버립니다. 이미 손에 잔뜩 들고 있으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일을 받아옵니다. 근무 시간이 부족하면 저녁, 주말 할 것 없이 노트북을 싸들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지만, H에게 집은 ‘조용히 일할 수 있는 확장된 사무실’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H는 일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긍정하고 몰입하지만, 정작 사람 앞에서는 부정 회로가 먼저 켜집니다. 누군가의 강점보다 ‘보완해야 할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기대에 닿지 못하면 시니컬한 표정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대문자 T 성향답게 돌려 말하는 법이 없어서 팩폭은 그의 기본 언어 습관이 되고, 까칠함은 체온처럼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H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바로 지적할 것 같다”,
“기대치가 너무 높아 같이 일하면 늘 긴장된다”는 말들이 뒤에서 자주 오갔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H는 일에 대해서는 엄격한 완벽주의자이고, 그 기준이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도 확장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H는 선생님 같다. 워커홀릭이다. 도베르만이다. 라는 별명을 달고 지냅니다.
H에게 숨겨진 욕구와 불안
처음엔 단지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까칠하고 기준이 높고, 말투가 예리해서 주변을 날카롭게 만든다는 정도로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애쓸까?’ '저렇게 팍팍하게 살면 행복할까?' 라는 질문이 앞섰습니다. 그 질문은 결국 H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두 가지 욕구와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인정 욕구] H는 모든 일을 잘 해내고 싶고, 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과하게 팽창하면서 ‘혹시라도 틀어지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늘 배경처럼 깔려 있습니다. ‘괜찮다’는 말보다 ‘부족하다’는 말이 더 크게 들리고, 칭찬보다 실수가 오래 남습니다. H의 이러한 인정 욕구는 H는 더 완벽해지려 애쓰고, 그 절박함이 때로는 타인을 향한 차가운 말투로 표출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패턴을 ‘불안-회피 애착’에서 자주 발견된다고 설명합니다. 성과와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면서도, 사람에게 실망할까 두려워 감정적 거리를 두는 형태죠. H의 까칠함도 결국 관계의 실패를 피하려는 보호기제였습니다.
[통제 욕구] H에게는 “내가 해야 안전하다.” 는 믿음이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 일이 많아도 내려놓지 못하고, 누군가가 조금만 예상 밖으로 움직여도 불편해집니다. 협업이 어려웠던 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H의 불안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따르면 사람은 ‘유능감’이 위협받는 순간 불안을 강하게 느끼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과도하게 통제하거나 완벽주의로 치닫기도 합니다. H의 집요한 기준과 통제 욕구는 사실 ‘유능하다는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를 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H는 바로 필자인 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연재의 마지막 빌런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까칠하고, 기준이 높고, 소통하기 까다로운 사람’으로 존재해왔습니다.
말투가 날카롭다는 조언도, 사람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얼굴에 실망이 드러난다는 피드백도 받았습니다.
이 연재를 쓰며 깨달았습니다.
나는 타인의 빌런을 관찰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 안의 빌런과 먼저 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연재를 통해 세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모든 빌런의 뒤틀린 행동 양식은 깊은 불안에서 시작됩니다.
까칠함, 통제 욕구, 완벽주의, 자기중심성...이 모든 기저에는 ‘불안’이라는 연약한 실체가 존재했습니다. 그 불안은 결코 악의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빌런들을 무작정 미워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둘째, "별로다"라는 시선은 놀라운만큼 주관적이었습니다.
한 조직에서는 문제아로 찍힌 사람이, 다른 조직에서는 아무 문제 없는 구성원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맥락과 문화라는 틀 안에서 언제든 뒤집히는 프레임이었습니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를 ‘사람-환경 적합(P-E Fit)’이라고 부릅니다. 개인의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성향과 환경의 궁합이 빚어내는 결과라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영웅도 될 수 있는 동시, 또 다른 곳에서는 빌런이 될 수 있는 잠재적 빌런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공정한 평가와 보상 시스템, 기형적인 조직 구조, 이탈된 리더십. 조직의 이 모든 환경적 요인이 사람의 불안을 자극하며 욕구를 뒤틀리게 만들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에서처럼, 보통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맥락만 달라지면 누구든 남을 해칠만한 욕구와 본능이 발화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정상인 척’ 살아가지만, 그 속에는 각자만의 불안을 조율하고 제어하며 버티는 또 다른 얼굴들이 숨어 있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더 고백하자면, 그/그녀가 처했던 맥락과 환경 속에 제가 놓인다면 저는 과연 더 성숙한 자아를 지킬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황 앞에서 흔들릴 수 있는, 생각보다 비슷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깨달음들이 차곡차곡 쌓이자, 처음과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더는 누군가를 가볍게 ‘빌런’이라 부르기 어려운 곳에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왜 별로일까> 연재는 오늘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처음에는 세상에 별로인 사람이 너무 많아 글감이 끝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안의 불안과 맥락, 이유를 이해하게 될수록 더 이상 누구도 ‘빌런’이라는 이름으로 단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연재의 주인공으로 올릴만한 사람이 이제는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은 원래부터 별로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불안하고 나약하고 복잡한 존재일 뿐이지요. 그 복잡함을 조금 이해하려는 시도만으로도 사람은 훨씬 덜 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런 깨달음에 다다르자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습니다. 늘 인간 관계 때문에 굳어 있던 얼굴과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고, 조직생활이라는 낯선 전장에서조차 숨이 트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이었구나’라는 이해는 저를 지키려는 과잉의 경계심을 천천히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연재의 출발점은 회의였지만, 마지막 문장은 뜻밖에도 다정함에 가 닿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오해하고, 불편해하고, 때로는 미워하면서도 결국은 다시 함께 살아가려 애쓰는 이유. 그것은 아마 사람이라는 존재가 근본적으로 ‘이해받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다정함을 인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빌런조차 한 인간으로 바라보려는 태도 말입니다. 그 마음이 자리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별로가 아닙니다.
사람은 별로가 아니라, 다만 아직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 존재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함께 나누며,
<사람은 왜 별로일까?>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그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