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도서관 03

by 산너머

모든 순간을 내가 선택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무수히 많다. 한 달 동안 야간연장을 같이 했던 직원이 기간 만료가 새 직원이 들어왔다. 도서관 취업은 계약이 일 년이었다. 삼 개월 실업급여를 받고 다시 재취업을 해야 해서 직원이 계속 바뀐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 누가 들어올지 모른다.

삼십 대 후반 여자였다. 열 살 차이가 났다. 말 수가 나보다 없었고 인사할 때도 고개만 숙였다. 말 수 없는 우린 잘 맞았다. 어린이 자료실은 오후 6시에 문을 닫고 사무실은 당직자 한 명, 안내대 반장님 한 명, 디지털 자료실 기간제 직원 한 명이 남고 종합자료실은 오후 6시부터 둘이 일한다.


어린이 자료실은 유아와 어린이 책, 종합자료실은 청소년부터 성인이 보는 책이 내 키보다 높은 서가에 가득 꽂혀있다. 서가와 서가 사이는 두 사람만 지나다닐 수 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료 호칭은 선생님이다. 이름까지 부르지 않고 성만 붙여 서로를 부른다. 정 선생은 성실했고, 본인의 스타일대로 일했고, 서로 참견하지 않고 존중해 줬다.

고향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을 다니다가 도서관 일을 하고 싶어 서울 어느 대학교 문헌정보과를 다시 들어가 사서 자격증을 취득해 서울 어느 도서관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코스모스 도서관이 두 번째 취업이었다. 결혼 생각은 없다는 얘기, 가족은 고향에 있고 혼자 자취하고 있단다. 사생활은 여기까지만 나눴다. 업무적인 것만 공유했고 책에 관한 것만 나눴다.


낮에 책 배열을 보다가 개방형 창문이 아닌 반개방형 창틈으로 밖을 내려다보면, 마을 사람들이 심어 키운 텃밭이 보였고 밭 가에 잡초가 무성했다. 도심 속 농촌 같았다.

퇴근하는 밤, 어둑한 버스 길은 논을 지나고 밭을 지나 집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밤 10시에 집에 오면 몹시 배가 고팠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 밥을 한 끼 먹고,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도서관에서 저녁 먹는 시간은 5시. 그리고 일하다가 집에 오면 허기가 졌다. 늦은 밤에 밥을 해서 먹고 치우면 자정이 된다. 바로 잘 수 없어 새벽 2시쯤 잔다. 이때부터 나의 생활은 완전 야행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밤 고양이냐고 놀리면 아니라고, 노랗게 피는 달맞이꽃이라고 부득불 우겼다. 내가 선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습관이 되었다.


10월 중순, 순미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울음소리가 하늘로 터지던 화장터. 더 살고 싶어 했던 마흔네 살 순미의 죽음 때문에 울음이 터졌고 옆 화장터에는 더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나서 심장을 에이게 했다. 이십 대 청년이 생을 마감했단다. 누군 살고 싶었는데 죽었고, 누군 살기 싫어 죽었다. 삶이 그들을 속였다. 순미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삶은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리 빨리 날 데려가려는 걸 보니 하나님은 없어. 나처럼 억울한 팔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화장터로 들어가는 관을 보고, 야외 벤치로 나왔다. 가을하늘은 높고 깊었다. 울다가 하늘을 보다가 가을 물이 들어가는 들판을 보니 나무들이 아스라이 번졌다.

“그 옷 내가 가져갈게. 아깝잖아.”

“....”

순자는 순미 바람막이 겉옷을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하고, 순미 남편, 즉 재부는 대답을 안 하고 옷을 들고 있다. 전라도 산속에 들어가서도 순미가 매일 입고 있던 바람막이가 왜 화장터로 와 있지? 듣고 있자니 유품이라 가져가겠다는 게 아니고 새 옷인 데다 비싼 명품이라 그런 것 같았다. 기가 막혔다. 듣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피했다. 나중에 들으니 처형이 괘씸해 막내 재부가 도로 가져갔단다. 못 가져간 순자는 투덜거렸다나…. 욕심이 끝도 없다. 순미가 죽은 뒤부터 부자가 되어야지, 돈 많이 벌어야지 이런 말을 안 했다. 있는 대로 거기에 맞춰 살기로 했다.

순미는 서울에 집 세 채, 경기도에 전원주택 한 채, 산과 땅이 많았다. 죽을 땐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한 줌 흙밖에 남는 것이 없다.


순미는 죽기 하루 전날 환상인지 환청인지 천당을 봤다고 했다. 빛 밝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니 꽹과리가 울리고 나팔을 불며 잔치가 벌어졌고, 하나님이 두 팔을 벌려 반겼다며 이 세상은 미련이 없다고 했다. 그래, 무화과 열리고 죽음도 없는 천당에 갔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순미야? 억울했던 일들은 다 잊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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