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도서관 05

by 산너머

젊었을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 책을 봤다. 그 가슴 저림이란! 그 뒤부터 샘터 월간지를 샀다. 법정 스님 수필 ‘산방한담’이 맨 앞쪽에 매달 실려 있었다.

법정 스님이 동안거에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글을 통해 상상만 하던 불일암을 찾아갔다. 스님이 계실 때 가면 방해가 될테고 갈 용기도 없었다. 겨울나무가 우겨진 산길을 따라 걸으며, 이쯤에 붓꽃이 피어 있었겠지…. 대나무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오솔길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벅찼다. 도서관 서가에서 법정 스님 책을 발견하니 그 시절 그날이 그리워 반가웠다. 법정 스님 책은 거의 다 봤다. 그중에 책으로 엮은 ‘산방한담’을 꺼내 다시 책장을 넘겼다. 자리에 앉아 한 장씩 읽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비우려 하면 욕심이 다시 채워지는 하루하루지만 책 제목만 봐도 산속 암자에 앉아 있는 것 같고, 바람 소리가 대나무 숲을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서가에서 책을 꽂는 보조 인력 여자분이 데스크 책상에 책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었나 보다. 보조 인력 공공근로는 형편이 어렵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을 시에서 일자리를 마련해 도서관에 배치해 주는 제도다. 따로 책상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지만 짬짬이 서가 안에 있는 의자에서 쉬면 된다. 책상을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마음 한쪽이 꼬여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일하는 게 편해 보여서 그런 가? 종합자료실 담당 주사에게 사서들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본다고 못 보게 하라고 여러 번 항의했다고 한다.

어느 날부터 A4 용지에 인쇄된 <데스크에서 책을 보지 마세요. 책 쌓아놓지 말고 자주 꽂아 주세요> 이러한 문구가 컴퓨터 옆에 딱 붙어있었다. 책을 보는 곳에서 책을 보지 말라니. 우리는 불만스러웠지만 옳은 말을 했다가는 찍혀서 다음 취업에 불이익을 당할 있으므로 배알이 뒤틀렸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다고 책을 안 볼 수 있나. 서가 오배열 보는 시간에 책장 앞에 서서 읽던 책을 정독했다. 눈치는 늘게 마련이고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은 선에서 융통성 있게 행동하면 된다.


뒤뚱이 심 여사는 나에게 관심이 많은가 보다. 육십이 안 됐는데 너무 뚱뚱해 뒤뚱거려서 '뒤뚱이'라 하겠다. 서가 안에서 일도 안 하고 책을 본다고 또 일러바쳤다. 사무실에 얘기하면 뭘 얻어먹을 게 있었나 보다. 기껏해야 프림 탄 커피 한잔에 에이스 과자 한 봉지일 텐데, 먹을 거에 환장한 여자다. 사무실에서 나를 찾는다고 해서 내려갔더니 서가에서 책을 읽었냐고 물어본다. 증거는 없을 게 뻔하다.

”책 배열하면서 옛날에 감동 있게 읽던 책이 보여 몇 장 뒤적여봤어요. 주사님? 저랑 올라가셔서 제가 오배열 보고 있는 서가 함 보시겠어요? 책 배열 틀리거나 책이 엉망으로 돼 있으면 심 여사한테도 주사님에게도 머리 숙여 죄송합니다, 할게요. “

주사는 가만히 보더니 알았으니 됐다고 한다. 젊은 박 주사 팔을 잡으며 애교를 섞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올라가 보자고 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강 선생님 일 잘하신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저랑 지금 같이 올라가 보기 곤란하시면 제가 출근하기 전 오전에 둘러보세요~오~. 사실 지금 보셔야 제 말이 맞는다는 걸 아실 테지만…요~오. 호호호“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올라왔다. 뒤뚱이를 가만히 안 두어야겠다. '눈동자'를 망치로 내리친 게 일 년이 안 됐는데, 이 좁은 지역에서 비슷한 사건이 나면 잡힐 게 뻔하다. 이 년을...아! 참 욕 안하기로 했지. 욕 취소. 심여사를 숨도 못 쉬게 하고 싶지만 내가 살아야 하니 내 성질을 죽여야 한다.


며칠 동안 생각을 했다. 망치로 죽일수는 없고, 사실 난 누굴 죽인 적은 없다. 마음 약한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다만 뒤뚱이를 평생 못 걷게 해야겠는데, 내가 봐선 이제 오십 대 후반이니까 십 년 안엔 못 걸을 게 분명하다. 그럼 도서관에 두 번 다시 배치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공공근로 일 중에서 도서관 일이 제일 편하고 깨끗하다. 그렇지 않으면 덥거나 추운 바깥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화단의 잡초를 뽑아야 한다. 그럼 무릎이 더 아파서 공공근로를 못 다닐 것이다. 다니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고. 도서관만 두 번 다시는 못 다니게 해야겠다.

비우고 살면 행복해지고, 무소유를 실천하라 했고, 자연에서 배우라고 하신 법정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조신하게 살려고 했다. ‘조신’은 무슨, 그건 책에서만 쓰여 있고 뛰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스님이니까 실천하셨고, 일반인인 나에겐 해당되지도 않을뿐더러 실천할 수도 없다.


뒤뚱이가 오배열 보는 서가를 노리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도서관에서 제일 으슥해서 들킨 확률이 거의 없는 900번 역사 쪽이었다.

책을 꽂는척하면서 마구 흐트러뜨리며 바꿔치기했다. 한꺼번에 많은 자리를 바꾸면 들킬 수 있으니 맨 위와 맨 아래 책장에 있는 책을 주로 바꿔치기했다. 맨 위는 높아서 사다리를 갖다 놓고 올라가야 하고 맨 아래는 무릎을 굽혀 앉아야 해서 무릎이 아픈 사람들은 힘들어한다.

며칠 해서는 직원들이 모를 수 있으니 석 달 동안 매일 화투 치듯이 900번 대 책을 쳐댔다. 뒤뚱이에게 책이 엉망으로 꽂혔다고 오배열 좀 보라고 하루에 몇 번씩 지적했고, 담당주사가 올라오면 900번 대 서가 요즘 왜 이리 엉망이냐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서가는 더 열심히 오배열을 봤다. 한 권도 틀리지 않게 한 줄로 딱 맞춰 정리했다. 뒤뚱이는 원래도 정확하게 일을 하지 못했다. 그래놓고 서는 책 좀 본다고 입을 놀려. 입을 이불 바늘로 꿰매는 상상을 했다. 무릎을 작두로 자르는 상상을 했다. 상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무릎까지 뒤틀리고, 형편도 나빠 보이는 것이 정신까지 뒤틀려 버렸으니 앞으로 뭔 좋은 일이 있겠냐마는. 박 주사도 이용자도 900번 대 책이 제자리에 꽂혀 있지 않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 이렇게 시달리다가 뒤뚱이는 인사도 없이 일을 그만두었다.


기간만료가 돼 코스모스 도서관을 마치면서 에이스 과자를 사서 사무실로 내려가 박 주사와 살짝 포옹하며 또 뵙겠다는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뒤뚱이 심 여사가 도서관에 다시 배치를 받았나 알아봤더니 그 뒤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나한테 질렸겠지. 책에 질렸을 거야. 엉망인 책을 제자리로 정리하느라 온몸이 아팠겠지. 무릎도 시원찮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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