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막 도서관 01

by 산너머

코스모스 도서관이 만료되면서 실업급여를 3개월 동안 받았다. 월급의 80% 정도다. 많지 않지만 정확하게 꾸준히 들어와 먹고는 살았다.


큰아들은 제대해 다시 대학을 들어간다고 해서 독서실을 끊어줬고, 딸은 이혼한다고 하더니 자식이 있어 별수 없이 참고 산다. 다행히 시집이 잘 살아 사위가 월급을 안 갖다 줘도 먹고는 살았다. 단독주택 전세를 얻어줘 방 두 칸에 널찍한 거실이 있고, 부엌에 식탁도 놓고 산다. 딸이나 나나 비바람 막을 집이 있고 먹고는 사니 감지덕지다. 나도 살았는데 살아지겠지. 뾰족한 수가 없거니와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막내아들은 군대에서 나오는 월급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쓸만한 자식은 막내아들뿐이다. 남편은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영업일을 한다. 빚 갚는다고 돈 한 푼 보내주지 않는다. 빚을 갚고 있는지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신경 끊었다. 이혼만 안 했을 뿐 남같이 산다. 한 달에 한 번 자식들과 함께 밥 한번 먹는 게 다다. 부부생활을 안 한 지 몇 년인지 손에 꼽고 싶지도 않다.


혼자가 되어 외롭고 고독하지만, 혼자라 편하고 자유롭다. 내 처지가 싫어 몇 명 안 되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뜸해졌다. 서울로 올라가 만날 땐 반가운데, 아니꼬운 것도 많다. 남편이 어쩌고 저쩌고 결국 들어보면 자랑이다. 반가운 것도 잠시. 너무 공허했다. 부질없다는 생각뿐이다. 일 년에 몇 번 나가다가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그마저 안 나가게 되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만나야겠다.


혼자 일어나 믹스커피를 타면서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본다. 13평 임대 아파트 7층에 산다. 부족한 내 형편에 비해 햇볕은 충분하다. 보지 않아도 텔레비전을 틀어 놓는다. 텔레비전이 말을 거는 것 같다. 작은 원형 식탁에 풀꽃을 꽂아 놓고 꽃을 마주 보면서 커피를 마시면 씁쓸하지만 달콤하다. 식탁에 앉아 한가득 펼쳐진 하늘을 본다. 흘러가는 것이 너뿐이겠니? 나도 정처 없이 흘러간다.


3개월이 흘러 실업급여가 끝나갈 무렵, 다시 도서관 공지를 본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기간제를 모집하고 있다. 작은 어린이 도서관이 아니고, 큰 건물 3층이 어린이 책으로 꽉꽉 찬 도서관. 새로운 형태의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시기가 맞기 때문에 이력서를 넣었다.

면접을 봤다. 느낌이 괜찮았다. 말수가 적고 말주변이 없지만, 도서관에서 일한 경력과 취업이 절실해 말을 조리 있게 잘하게 되었다.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나는 인상이 좋다. 성실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패션 감각이 있어 젊게 보인다는 말도 적잖이 들었다. 내 속을 알면 절대 뽑을리 없지만 속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하다.


새봄이 막 올 때 어린이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다.

교통이 좋다. 버스에서 내려 8차선 도로를 건너 ㄷ자로 걸어가야 한다. 길 양쪽으로 조성한 가로수가 족히 삼백 미터는 되겠다. 느티나무로 시작해 단풍나무와 벚나무, 산딸나무, 꽃사과나무, 살구나무가 중간중간에 끼어 있다. 막 새순이 올라온 나뭇잎이 연연하다. 여린 잎 사이로 아침 빛이 내리는 풍경이 잡지에 나오는, 가 보지 못한 외국 어디쯤인 것 같다. 길 끝에 황토색 도서관 건물이 보인다.

도서관 안은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서가가 1층, 1.5층, 2층, 2. 5층으로 나뉘어 있다. 1.5층으로 올라가면 한쪽 편에 원두막이 놓여있다. 나무로 짠 원두막 지붕. 낮은 계단 세 칸을 올라가면 마루가 맨질맨질하다. 다리를 쭉 뻗고 책을 볼 수 있는 대청마루 형태의 원두막이다. 그래, 오늘부터 여긴 원두막 도서관이다.

고향 화전 밭에 원두막이 있었다. 다듬지 않는 나무를 칡넝쿨로 이어 볏짚을 얹은 지붕. 원두막에 앉으면 대충 엉겨진 나무 사이로 밭이 다 보였다. 높았다. 조심해서 내려와야 했다. 처음엔 무섭지만 들락거리다 보면 치마를 입고도 잘 올라 다녔다. 고향 원두막하고 전혀 다른 어린이 도서관 원두막은 통나무로 지어져 튼튼하고 낮았다.


같은 시기에 취업이 된 기간제 이 선생은 인상이 참하게 생겼다. 속이야 어떤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지만, 같은 날 첫 출근을 했다. 원두막 도서관은 열람실도 디지털 자료실도 없다. 오로지 유아 책과 어린이 책만 2.5층까지 차곡차곡 싸여있고, 쌓여있다.

1층 서가는 천장고가 낮아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 책을 찾고 꽂아야 한다. 모내기하는 자세랑 흡사하다.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설계했다는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님과 함께 도서관을 찾는다. 일하는 직원들도 다 어른들이다. 일이 힘들다고 하기도 전에 천장고가 낮아서 허리병 나는 줄 알았다. 천장을 낮게 설치하고 1.5층을 만들어서 원두막을 갖다 놓았다. 발상은 기발했는지 몰라도 책 꽂을 땐 지랄 같았다. 허리병 날뻔했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이 선생이 꾀부리지 않고 큰 실수 없이 일해서 일하는 동안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뒤 도서관 정규직 채용 면접을 같이 보게 되는데, 면접관 질문에 답하지 못해서 이 선생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돈 잘 벌던 남편이 병에 걸려 형편이 어려워져 안정된 도서관에 취업하고 싶었는데, 질문에 답도 못했으니... 나는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도서관 정규직이 된다. 이 사연은 차차 쓰기로 하겠다.


엘리베이터를 맨발로 타니(물론 양말이나 스타킹은 신었음) 발바닥이 근질근질해 덧신을 준비해 신었다. 3층으로 가면 휴게실과 사무실과 외국 자료실이 있다. 여기는 아이들이 와서 책과 놀다 가는 곳이다. 부모님과 함께 반나절씩 또는 종일 놀다 가기 때문에 간식과 도시락을 싸 오는 이용자들이 많아서 휴게실이 넓고 쾌적하다. 전면이 반투명 유리창이고 예쁜 화분이 놓여있다. 탁자와 의자 색이 밝고 편하다.


원두막 도서관은 잡다한 일이 많아서 너무 바쁜 일터였다. 안내대가 따로 없어서 대출증도 만들어야 하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일은 책에 치여서 얼른 일 년이 흘렀으면 했다. 두 번 다시는 어린이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가에 있는 책을 꺼내 바닥에 앉아 보다가, 다른 책을 꺼내 누워서 보다가, 밟고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휴게실 가서 먹다가 다시 책을 꺼내면 책은 장난감이 된다. 기차놀이를 하고 블록을 쌓는다. 책 크기가 들쑥날쑥. 모양은 세모, 사다리꼴, 반달, 동그라미, 별, 집, 자동차, 입체 형태, 뚫린 책, 한 줄로 쭉 연결되는 책. 진짜 별별 모양이 다 있어서 다양하고 풍성한 놀이터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지고 놀아서 훼손이 잘된다. 훼손된 책 수리도 우리가 해야 한다.

외국어책도 다양해서 부록까지 빌려주고 부록관리도 잘해야 한다. 섞였다가는 무척 곤란하고 피곤하다.


외국 어디쯤인 것 같은 가로수 풍경은 열매가 떨어져 외국은커녕 땟국 절은 어느 소도시가 된다. 현실의 괴리감은 언제나 남루하다. 나쁜 생각 지우기, 다가올 걱정 접어두기를 하면서 단점투성이 현실은 여기까지만 하고, 분주하지만 소소한 장점으로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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