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녀가 자빠져 있다가 종합자료실로 들어오면 나는 도서관 정원을 몇 바퀴 돌다 왔다. 자빠져 있다가 오는 직원도 있는데,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온다 한들 누가 뭐라 그럴 수 없다.
가을이 완연하게 왔다. 족히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잎은 노란색 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감나무와 똑같이 생긴 고욤나무에도 포도송이만 한 열매가 조랑조랑 달렸다. 알갱이 하나를 따 먹어봤다. 떨떠름하고 달콤한 감 맛이랑 똑같았다.
시멘트 벽돌 담장은 높다. 그 담장 안에서 나는 잘 물든 은행나무를 올려다보고, 담장 밖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골목길을 내려다본다. 중간에 부서져 주저앉은 담장 사이로 낮은 슬레이트 지붕이 보인다. 담장 밑은 그늘지고 습해 이끼가 자라고 이끼 사이로 고사릿과 식물이 원시림을 떠오르게 했다.
좁은 화단엔 자주색 국화가 피었고, 어성초꽃이 희끗희끗 피었다. 처음 본 꽃이라 들꽃 책을 뒤적여보니 비린내가 난다는 어성초였다. 잎은 고구마잎과 닮아있다.
긴 시간 나와 있을 수는 없다. 십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담벼락을 따라 서너 바퀴 돌다가 들어간다. 믹스커피 한 잔을 타가지고 나갈 때가 많다. 가끔 이용자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지만 모르는 척했으면 한다. 머리 식히고 눈의 피로를 푸는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싶다.
은행잎이 샛노랗게 물들다가 한꺼번에 떨어지면 폭신폭신하다. 굳이 낭만을 논하지 않아도 담장 길 따라 노란 카펫으로 낭만이 깔린다. 노란 잎 위에 단풍나무 잎과 감나무 잎이 떨어지면 남미 파키스탄 카펫 같다. 남미를 가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과 책에서 본 그 색상이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분다. 늦가을이다. 다시 한 해가 가고 있다.
김선녀 아들은 실형을 받았다. 친구와 그 가족이 합의해주지 않았다. 얼굴을 찌른 건 살인이나 마찬가지고 평생 흉터가 남게 되었고,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한 건데 죽으라고 찔렀으니 살 만큼 살아야 한다고 했단다. 계획적 살인이 아니라서 징역 2년 8개월을 받았다. 김선녀 측에서 항소했다. 대법원에서는 어떻게 감형이 될지 몰라도 김선녀 아들은 전과자가 되었다.
김선녀는 엎드려 있거나, 이용자가 와도 고개를 들지 않아서 건의 사항에 직원이 일도 안 하고 엎어져 있다고 이런 직원은 도서관에서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항의 글이 짤막하게 올라왔다.
관장님이 나를 불렀다. 김선녀와 야간연장을 같이 하고 있으니 사실인지 알고 싶어 했다.
이 도서관에 다니는 일 년 동안 관장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나를 성폭행 하려다 혀 잘린 관장, 김선녀 사건이 터지던 그때 관장으로 있던 남자관장(김선녀 사건을 처리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남), 지금 나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하는 여자관장. 이 관장님은 도서관에서 술을 먹거나 허투루 일하는 직원들을 아주 많이 혐오한다고 들었다.
“그날이 있은 뒤로 엎드려 있거나 청소하는 여사님 방에서 자거나 했습니다. 이용자가 와도 고개를 들지 않고, 뭔 화가 그리 많은지 책으로 책상을 때렸고, 키보드를 내리치고 그랬습니다.”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사실 그대로 말했다.
겨울이 왔다. 단풍잎 위엔 하얀 눈이 쌓였다. 기간제가 끝날 때쯤 김선녀는 다른 곳으로 좌천이 되었다. 열다섯 곳이나 되는 도서관 책이 모이고 분류하는 곳으로 발령이 났다. 엎드려 있을 시간은커녕 쉴 틈 없이 바쁜 곳이라고 들었다. 그 부서로 빠지거나 뭘 모르고 그곳에 일하게 되면 중간에 그만둘 정도로 힘든 곳이었다. 김선녀는 그곳에서 왕따를 당하고 아들은 실형을 받아 감옥 생활로 들어가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김선녀는 도서관에서 일하기 전에 정육점에서 일했다. 오겹살과 삼겹살의 차이점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 자기가 정육점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 안다고 해서 그러냐고 수긍을 한 적이 있었다. 김선녀는 도서관보다는 정육점이 어울렸겠다. 이곳에 들어와서 욕심이 과해 무기계약직이 되었고, 남자 문제가 길어져 꼬리가 잡혔고 홈페이지에 김선녀 사건과 김선녀 태도가 올라가면서 본인도 견디지 못했다. 만약에 정육점에서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이 지역 사람이 다 알게 되지 않았을 테고, 좌천도 없고 원래 문제 있던 아들이었지만 흉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다.
무쇠도 갈면 바늘 되듯이,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듯이 분노에 휩싸여 복수하다 보니 능숙해지고 잔인해졌고 두려움보다는 통쾌했다. 김선녀도 죽이고 싶었지만, 깃털 노인네를 먼저 죽였기 때문에 같은 도서관에서 연거푸 살인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김선녀를 죽이지 않았어도 김선녀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신중했던 서서히 죽어가는 김선녀를 가만히 앉아 관망했다.
기간제를 잘 마무리 하고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이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자원봉사를 할 수 있고, 자원봉사를 하면 다음 취업에 유리해진다. 내가 저번에 그랬죠? 도서관 기둥을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고!
3개월이 지나고 야간 연장하던 사서가 그만두게 되면서 시기가 딱 맞아 이력서를 넣었다. 다시 야간연장 기간제를 그대로 하게 되었다. 야간연장을 세 번째 하고 있으니 무기계약직이 될 거라는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