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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준이

25화 세상은 느린 아이를 필요로 한다

by 작가

25화 세상은 느린 아이를 필요로 한다

빠른 아이는 많다.

똑똑하고 웃기고 센스 있고

보드게임 룰을 한 번에 이해하고

순식간에 친구들을 사로잡는 아이들.


세상은 늘 그런 아이들에게 환호한다.

운동장에서 가장 먼저 공을 차고 가장 빠르게 줄을 서고 손을 번쩍 들고 정답을 맞히는 아이들 말이다.


나는 한때 그런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아니 내 아이도 그렇게 자라길 바랐다.

활발하고, 재밌고, 인기 많고… 학교에서 딱히 걱정할 일 없는 그런 아이.


그런데 내 아들은 조금 달랐다.

준이는 늘 조금 느렸다.

아니 사실은 많이 느렸다.


친구들이 달려 나갈 때 아직 신발끈을 묶고 있었고

보드게임 룰을 다 이해했을 때쯤 게임은 이미 절반이나 진행돼 있었다.

“아, 이제 알겠어!” 할 때는 게임이 끝나 있었다.

친구들은 웃고 준이는 멀뚱히 웃었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처음엔 답답했다.

“좀 빨리 움직여! 친구들 기다리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이 아이의 느림은 단점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이었다는 걸.


느린 아이는 오래 본다.

깊이 느낀다.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다.


친구들이 다 떠난 후에도 한 곳에 남아 조그만 개미를 한참 관찰한다.

“엄마, 개미는 다리가 여섯 개야. 근데 걔는 한쪽이 부러졌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멈췄다.


'누가 개미 다리까지 보나?'

바로 우리 아이가 보지.


준이는 하늘을 보며 걸었다.

구름을 보다가 가로등에 부딪힌 적도 있다.

나는 깔깔 웃었지만 그 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 오늘 구름은 케이크 모양이야.”

어째 나도 하늘을 보고 싶어 졌다.

구름이 정말 맛있어 보였다.


이 아이 덕분에 나는 조금 느려졌다.

아침마다 등굣길에 쫓기듯 뛰던 나 대신 이제는 준이의 속도에 맞춰 걷는다.

길가의 들풀을 보고 멈춰 서고 갑자기 “개미집 있어!” 하고 소리치는 아이 덕분에 무릎 꿇고 땅바닥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그 순간이 참 이상하게 행복하다.

세상은 빠른 아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느린 아이도 꼭 필요하다.


누군가는 세상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놓치고 지나가는 것을 발견해야 하니까.

세상이 너무 빨라서 지칠 때 그 아이들이 숨 쉴 틈을 만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이에게 “빨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해. 네 속도로 해.”라고 말한다.


아마 세상은 앞으로도 여전히 빠를 거다.

그럴수록 느린 아이가 필요하다.

깊이 보고, 느끼고, 한참 생각한 뒤에야 대답하는 아이.

그 아이가 결국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


준이는 오늘도 개미를 본다.

나는 그 옆에서 하늘을 본다.

우리는 둘 다, 세상을 조금 느리게 바꾸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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