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오해도 추억이 되는 시간
결혼식 날, 내 마음은 분주함과 설렘, 그리고 아쉬움이 뒤섞여 있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웃음과 축하 속에서 작은 실수들이 스쳐 지나갔고,
그 민망함마저도 이제는 따뜻한 기억이 되었다.
그 결혼식과 제주도 신혼여행을 마치고, 어느새 계절은 겨울로 깊게 들어섰다.
찬바람이 매서운 12월, 나는 인천에서 결혼 후 첫 직장을 구했다.
출근 첫날 아침,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으로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오래된 건물의 신혼집 목욕탕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아, 새벽 공기가 살을 에듯 차가웠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머리를 감다 보니, 갑작스레 허리에 찌릿한 통증이 번개처럼 스쳤다.
“아… 어떡하지…”
허리를 부여잡고 잠시 주저앉았다. 출근 첫날, 결석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외투를 걸쳐 입고 버스에 올랐다. 차창 너머로 얼어붙은 아침빛이 스쳐 갔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도, 앞으로 숙이지도 못한 채,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회사에 도착했다.
서류를 정리하고 메일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통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날 때마다 허리 속 어디선가 사포로 긁는 듯한 화끈거림이 올라왔다.
결국 참다 못해 상사를 찾았다.
“죄송하지만… 허리가 너무 아파서, 오늘은….”
“첫날부터 병원이라니… 많이 아픈가 봐요. 얼른 다녀와요.”
말끝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진단은 허리 근육 손상. “한 달 이상 물리치료 받으셔야 해요. 당분간 무리 금지.”
의사의 말이 못처럼 콕 박혔다.
약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겨울 햇살이 낮게 깔려 방바닥까지 길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빛 속에서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났다. 결혼 직후부터 왜 이렇게 몸이 말썽일까.
또 웅이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다.
저녁에 웅이가 들어오자마자 표정을 살폈다.
“병원에서 뭐래?”
“근육 손상… 한 달 정도 치료 받으래.”
웅이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큰일 났네. 처가에 AS 해달라고 전화해야겠다. 이렇게 약한 줄 몰랐네~”
나는 얼떨결에 웃음이 터졌다. 미안함 사이로 스며드는 가벼운 농담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조금 가볍게 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에이, 무슨 미안이야. 내 마누라인데 내가 책임져야지. 자, 고객님—온수 보온 서비스 나갑니다.”
그날 밤, 웅이는 약국에서 파스와 온찜질팩을 사 오고, 전기장판을 꺼내며 방바닥을 정리했다.
“뜨거우면 바로 말해.”
그의 손길은 서툴렀지만 조심스럽고 성실했다.
다음 날 아침, 웅이는 출근길에 나를 물리치료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전기자극 했어? 초음파는?”
“응. 물리치료 선생님이 자세 조심하라 했어.”
“좋아, 그럼 오늘은 설거지는 내가. 너는 앉지도 말고 서지도 말고—그냥 누워있기.”
“누워서 어떻게 살아….”
“오늘만. 내일도.”
그의 장난은 끝이 없었지만, 집안일을 도맡는 손은 부지런했다.
빨래를 널고, 국을 데우고, 약 시간을 챙기는 동안, 나는 죄책감과 고마움 사이에서 하루를 건너갔다.
주말이면 웅이는 거실 테이블 높이를 내 허리에 맞춰 재조립하고, 부엌 싱크대 앞엔 발판을 놓았다.
“허리는 각도 싸움이야. 의자 높이 1센티만 달라도 차이가 난대.”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아본 정보들을 하나둘 실천해 주었다. 밤에는 베개로 무릎 사이 간격을 맞춰 주고,
새벽에 내가 뒤척이면 “자세 바꿔줄까?” 하고 살며시 묻곤 했다.
그렇게 한 달 남짓한 겨울이 흘렀다. 치료가 끝나갈 무렵, 창밖의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이 찾아왔다. 마침 결혼 후 맞는 나의 첫 생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이번엔 어떤 깜짝 선물을 준비했을까?’
저녁이 되어 웅이가 들고 온 건 큼지막한 상자였다.
포장을 풀자, 그 안에는 반짝이는 새 게임기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네 생일선물! 네가 플스2 좋아하잖아.”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연애 시절, 웅이 자취방에서 플스2를 신나게 했던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웅이가 즐기던 게임을 옆에서 보며 깔깔 웃었던, 단순히 그 시간이 좋아서였지…
내가 게임기를 갖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아… 고마운데… 내가 게임을 좋아해서 한 건 아니잖아…”
내 목소리에는 이미 실망이 묻어 있었다.
웅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심심할까 봐… 너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가 내 취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서운함, 나를 위한 선물 같지 않다는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날 밤,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고, 웅이는 부엌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 끓는 냄새가 은은히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우리는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웅이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서운해하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고, 나는 그 모름이 더 속상했다.
다음 날 아침, 서먹한 공기를 남긴 채 웅이는 출근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 문이 열리자 향긋한 꽃내음이 들어왔다.
웅이 손에는 작은 미니장미 화분과 목걸이, 그리고 생일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어제 건 장난이고… 오늘이 진짜야. 생일 축하해.”
웅이는 쑥스럽게 웃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작은 화분이 웅이의 마음과 함께 내 마음속에 깊게 들어왔다.
“나… 어제 너무 미안했어. 고마워.”
우리는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다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작은 꽃이, 우리에게 또 다른 시작을 알려주는 신호가 될 줄은...
PS: 작은 실수도, 서툰 축하도... 시간이 지나니 모두 웃음이 되네요.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