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다시 봄, 기다림 끝에 온 선물

포기한 순간, 삶이 건네준 선물

by 연빈

신혼시절 한동안 우리는 정말 평온하게 지냈다.
가끔 티격태격했지만 큰소리 내는 일 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지낸 그 시절.
퇴근 후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주말이면 함께 장을 보고,

늦은 밤엔 TV 앞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그 평범한 나날들이 지금도 참 그립다.


우리는 그 시대 기준으로 늦게 결혼한 편이었다.
서른을 넘긴 나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빨리 아이 가져야지~”
나도 처음엔 ‘조금 더 즐기고 나중에’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문득 ‘빨리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시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몸이 유난히도 예민하고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 시절, 결핵으로 병원을 한달도 넘게 다녔었다.

완치하기까지 엄마가 한의원에서 좋다는 한약도 많이 사다가 먹이셨다.

그때 진맥을 하면서 한의사가 건넨 말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덩어리처럼 박혀 있었다.

“몸이 많이 약해서… 나중에 불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쉽게 찾아오지 않자, 그 말이 더욱 날카롭게 되살아났다.

혹시… 나 때문에 아이가 안 생기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 짙어졌다.

달력을 붙잡고 날짜를 하나하나 계산했다.
배란일에 맞춰 마음을 준비하고, 조심스레 기대했다.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올 때마다, 손끝은 은근히 떨렸다.
혹시 이번엔… 하는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얽혀 있었다.

하지만 하얗게 비어 있는 한 줄.
그 냉정한 결과는, 늘 아무 말 없이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테스트기를 쓰레기통 깊숙이 밀어 넣었지만, 그 순간의 무력감과 허전함은 버려지지 않았다.
마치 내 마음 한 조각이 함께 구겨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차가운 진료실, 초음파 화면 속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의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봅시다.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말고요. 마음이 먼저 건강해져야 합니다.”
그 말이 위로였는지, 체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날 병원을 나서며, 세상이 유난히 회색빛으로 보였다.


그런 나를, 웅이가 모를 리 없었다.
아무 말 안 해도, 내 표정과 숨소리만으로도 다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내 어깨를 가만히 감싸며,
“우리 그냥… 아기는 천천히 가지자.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잖아. 즐겁게 살자.”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날 뻔했다.

조급함을 내려놓기로, 그리고 ‘언제든 와줄 거라’ 믿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운 지 몇 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2004. 다시 봄,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던 순간, 웅이가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꿈을 꿨는데… 창가에 미니장미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더라.”

그 말이 참 예쁘게 들렸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예쁜 꿈꿨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깃거리처럼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날 아침, 습관처럼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미 수없이 반복했던 행동이라, 기대보다 익숙함이 앞섰다.
하지만 이번엔…
두 줄.
선명하고, 또렷하게, 숨 쉴 틈도 없이 내 눈앞에 나타난 두 줄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속이 숨 막히게 뜨거워졌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깨어나는 듯했다.
심장이 쿵쿵 뛰어, 세상이 내 안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눈가가 순간적으로 뜨거워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물을 삼켰다.


나는 부르지도 못할 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웅이를 찾았다.
“웅아… 이거 봐.”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이해한 듯 천천히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품은 말없이도 모든 감정을 전해주는, 깊고도 따뜻한 온기였다.
그 순간,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세상은 오직 우리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 품에 안긴 채 나는 알았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기적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시작되었다는 걸.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살며시 열리고, 그 안으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우리가 견뎌온 시간과 흘린 눈물, 그리고 포기하려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한 번에 보상받는 듯한 감정이었다.

나는 태몽을 꾸지 못했지만, 웅이가 본 그 미니장미의 꿈이 바로 우리 딸 연이의 태몽이었다.
창가에 피어 있던 그 한 송이는, 아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자라온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이제 눈앞의 현실로 피어올랐다.


그래서일까.
웅이에게 연이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웅이는 창가에 꽃이 피면 꼭 나를 불러 함께 보자고 했다.
그에게 미니장미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기다림 끝에 찾아온 선물’을 상징하는 특별한 기호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그 작은 꽃송이를 볼 때마다 오늘의 이 설렘과 떨림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S. 우리에게 찾아온 봄처럼, 여러분 마음속에도 봄이 피어나길 바랍니다.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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