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입대 전, 나에게는 군대를 미리 경험한 가까운 가족이 없었다.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내가 아는 군대란 그저 오래된 무용담과 뜬소문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정보도, 기대도 없이 논산 훈련소로 향했다.
훈련소에 바로 입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입소대대'라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3일간 머무는 그곳에서 우리는 추가 신체검사를 받고, 전투복과 전투화를 지급받았다. 입고 온 모든 옷과 신발을 소포에 담아 집으로 보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민간인이 아닌 존재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곳의 조교들은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역할은 서류 작업을 돕고, 우리를 식당으로 인솔하는 것이 전부인, 사실상 행정 보조에 가까운 '땡보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존재감은 컸다. 첫날, 한 조교가 우리를 향해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군인 중 너희들이 가장 쫄병이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곧 냉혹한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군 감옥으로 향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군대라는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선택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달았다.
입소대대를 떠나 26연대로 배치되면서 본격적인 훈련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5주차 마지막 날, 대망의 최종 행군을 앞두고 나는 얼차려를 받다가 사고를 당했다. 어깨 위에 있던 소총의 소염기 부분이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그대로 찧었고,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는 심각한 골절상을 입었다.
연대 의무실로 실려 갔지만, 중대장은 의무병에게 "그걸 맞추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 군대는 부상당한 병사마저도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곳이었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결국 논산 국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동기들과 함께 완주했어야 할 마지막 행군은, 그렇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날부터 나의 논산 국군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형외과에 입원하고 이틀 뒤,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하지만 나를 수술한 것은 군의관이 아니었다. 군의관은 옆에서 참관만 할 뿐, 실제 수술은 의무병들이 집도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환자가 아니라 그들의 훈련 교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내 손가락은 약간 비뚤게 수술되었고, 지금도 살짝 휘어 있다. 그 휘어짐은 군대식 의료의 민낯을 보여주는 흉터이자, 내가 겪은 시간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남았다.
수술 후 첫 주는 밤마다 가중되는 통증으로 잠을 설쳤다. 예민한 손가락이다보니 다른 부위 골절부위 수술보다 통증이 더 심할거라는 군의관의 말이 사실이었다. 야간 순찰을 돌던 한 간호장교는 플래시로 내 얼굴을 비춰보더니, "얘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고 있냐"라는 말을 툭 던지고는 의무병들과 함께 시크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군병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