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by 세현
이터널선샤인 중 한 장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 장면쯤은 지워버리고 싶다.

끝내 말하지 못한 대화, 돌아서던 뒷모습,

혹은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순간.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고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잊고 싶은 기억들은 더욱 선명하다.

그날의 공기, 목소리, 눈빛까지 우리는 그 장면을 수도 없이 되감는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내가 더 행복해질까?

아마 처음엔 가벼워질 거다.

불면의 밤이 줄고, 떠오르는 얼굴에 가슴이 조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질까.

그 기억이 사라진다면,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일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의 지우고 싶은 기억들은 아픈 순간에서 온다.

사랑이 식은 날, 다정함이 무너진 밤,

말 한마디가 칼이 되어 돌아오던 순간.

그때의 모든 순간은 최선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어리석고, 미숙하고, 상처투성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의 자신을 함께 지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결국, 그 기억 속의 나도 나였다.

지워진다면, 지금까지 성장한 나의 모습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기억은 잔인하게도 살아있는 존재다.

잊으려 할수록 더 강하게 살아나고,

피하려 할수록 더 깊은 곳에서 손을 뻗는다.

어쩌면 인간은 잊는 법을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은 받아들이려 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었단 증거다.

그때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단지 조용히 안아주고 다독여주기로 했다.

완벽하게 잊지 않아도 된다.

그냥 어느 날,

그 기억이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시간에게 맡기면 된다.


결국 우리는 지우지 못한 기억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그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사람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어서,

다음 사람을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다정하게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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