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황산벌의 기억을 찾아서

영화 <황산벌>과 제주도 <더마파크> 공연을 보며

영화 황산벌 장면



영화 <황산벌>을 이야기할 때, 나는 늘 전투보다 사람을 먼저 떠올린다. 칼과 창, 진형과 전략보다 오래 남는 것은 말투와 표정, 망설임과 침묵이다. 그래서인지 올여름 어머니를 모시고 간 제주 여행 중 우연히 들른 <제주 더마파크>에서 ‘황산벌 전투 공연’을 보았을 때, 그것은 관광 상품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질문처럼 다가왔다. 영화와 공연,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반복 재현되는 황산벌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1. 영화 속 황산벌 ― 영웅보다 먼저 보이는 사람들


영화 황산벌은 전쟁을 웃음과 사투리로 풀어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가볍지 않다. 백제군의 “거시기”라는 말은 명령이면서도 회피이고, 작전이면서도 삶의 언어다. 김유신은 이 말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실패한다. 권력의 언어는 삶의 언어를 끝내 해독하지 못한다.


계백 장군의 가족 살해 장면 역시 인상적이었다. 계백의 결단보다 더 강렬한 것은 계백 부인의 항변이다.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은 국가의 명분 앞에서 개인의 생이 어떻게 소모되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충의는 숭고할 수 있지만, 생명보다 앞설 수는 없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장면은 어린 관창을 대하는 백제군의 태도다. 그들은 아이를 몇 번이나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낸다. 전쟁터에서도 멈칫하는 마음, ‘이건 아니다’라는 인간적인 감각. 그러나 그 망설임조차 전쟁은 이용한다. 관창의 죽음은 전투를 가속하고, 사람들의 분노를 동원하는 도구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인간적인 선택을 가장 먼저 배반한다.


2. 제주 더마파크에서 본 황산벌 ― 재현 속에 남은 표정들


제주도 더마파크 공연


제주 더마파크의 황산벌 전투 공연은 분명 관광용이다. 말은 더 빨리 달리고, 선악은 더 분명하며, 결말은 명확하다. 그러나 공연을 보는 내내 시선은 장수보다 병사들에게 머물렀다. 말에서 떨어질 듯 버티는 몸, 전투가 끝난 뒤 숨을 고르는 순간, 장면 전환 사이에 스쳐 가는 얼굴들.


공연 속 병사들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한다. 싸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역할을 맡아 나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전쟁이 끝나면 말에서 내려 관객에게 인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사람들. 그 모습에서 영화 속 ‘거시기’가 겹쳐 보였다. 이름 없는 병사,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


이 공연은 의도치 않게 황산벌의 핵심을 반복한다. 영웅담을 보러 온 관객 앞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은 늘 가장 사소한 동작으로 나타난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병사, 전투가 끝난 뒤 고개를 숙이는 말.


3. 두 공간에 겹쳐진 『삼국유사』의 시선


영화와 더마파크, 서로 다른 매체가 공유하는 황산벌의 정서는 『삼국유사』와 닮아 있다. 『삼국유사』는 왕과 장군만의 기록이 아니다. 기이한 이야기, 주변부의 전승, 이름 없는 존재들의 흔적을 함께 남긴 책이다.


황산벌에서 ‘거시기’는 참으로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다. 『삼국유사』 는 늘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를 건네준다. 완전한 승리보다 불완전한 생, 영광보다 지속되는 삶. 제주 더마파크의 전투 재현이 끝난 뒤 남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수 소리 뒤에 이어지는 평범한 일상이 남는다.


4. 황산벌은 왜 계속 재현되는가


영화 속 황산벌과 제주 더마파크의 황산벌은 모두 묻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려 하는가. 영웅의 이름인가, 아니면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인가.


황산벌은 더 이상 660년의 전투만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개인, 명분과 생존 사이에서 늘 반복되는 선택의 장면이다. 그래서 영화로, 공연으로, 이야기로 계속 불려 나온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보통 사람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삼국유사』가 오늘까지 살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거창한 결론 대신, 인간이 인간답게 흔들리던 순간을 남겼기 때문에. 영화와 제주 더마파크에서 되살아난 황산벌 역시, 그 흔들림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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