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의 선택이 길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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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경 나는 뷰티학회에서 『삼국유사』를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신화’, ‘여성성’, ‘아름다움’이라는 키워드를 화장품과 미의 산업을 논하는 학회에서 이야기하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한 가지를 선택했다. 싫다는 마음을 앞세우기보다, 내가 오랫동안 읽고 연구해 온 텍스트를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말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학회에서 발표를 한 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제를 매우 흥미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구에서 발표하고 올라오는 기차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긍정적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았던 강연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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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표 이후, 뜻밖에도 여성성과 문화, 아름다움의 근원을 묻는 연구 제안이 이어졌고, 그중 하나가 아모레퍼시픽재단에서 여성성 연구로 저서지원이 선정되었다. 삼국유사 속 여성 이야기가 현대 여성 미학을 사유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나 자신에게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연구는 책으로 이어졌고, 강연과 논문으로 확장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시작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긍정적으로 감당했던’ 한 번의 발표였다. 마치 삼국유사 속 여성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경계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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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서울 한옥마을에 한옥박물관이라는 곳이 생겼다. 개관기념으로 첫 주제가 삼국유사 속 여성이었고, 나는 전시 자문도 하고 두 번의 강연도 하게 되었다.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삼국유사를 읽는 것이었다. 나는 아모레퍼시픽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을 활용해서 아름다움과 여성성을 이야기했다. 삼국유사 속 아름다움은 단정한 미나 안전한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꿈, 귀신, 납치와 유기처럼 불안하고 불편한 이미지 속에서 드러난다. 삼국유사는 왜 하필 이런 경계의 서사를 여성에게 맡겼을까. 그녀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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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꿈’의 이야기들이다. 허황옥은 꿈을 따라 바다를 건너왔고, 김문희 역시 꿈을 통해 정치적 운명의 문턱에 선다. 삼국유사에서 꿈은 허상이 아니라 결단의 신호다. 현실에서 말할 수 없을 때, 여성들은 꿈이라는 언어로 자신의 욕망과 방향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순종이 아니라, 미래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귀신과 연루된 여성들이다. 도화녀, 처용의 아내처럼 귀신과 함께 등장하는 여성들은 오래도록 기괴한 존재로 읽혀왔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귀신과 소통하는 여성들은 질서의 바깥에 있지만, 동시에 그 질서를 유지하는 숨은 중심이다. 이 불편한 아름다움은 세계의 어두운 부분까지 감당하는 힘에서 나온다. 삼국유사가 말하는 여성성은 깨끗함이 아니라 포용의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납치와 유기의 서사다. 선화공주와 수로부인은 아름답기 때문에 소문에 휘말리고, 빼앗기고, 버려진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축복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이 여성들을 피해자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선화공주는 새로운 나라의 상징이 되고, 그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훼손되지만, 이야기로 남아 다시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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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를 지나 내가 얻은 깨달음은 분명하다. 삼국유사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존재가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태도이다. 꿈처럼 시작된 선택이 현실이 되고, 귀신처럼 불편한 영역을 견디며, 납치와 유기의 폭력 속에서도 이야기를 놓지 않을 때, 여성성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복이 되어 돌아온다.
이러한 삼국유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학생들의 프로젝트 속에서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특히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라는 환경 덕분에, 수업 현장에는 예상보다 훨씬 대담하고 자유로운 여성 상상력이 쏟아져 나온다. 학생들은 삼국유사의 인물들을 박제된 신화 속 존재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미인대회, 환승연애, 학교 수호신 선정 같은 동시대의 형식과 감각을 빌려, AI 상상력으로 삼국유사 속 여성들을 현재로 소환한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학생들은 허황옥이 부모의 꿈만을 믿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한 장면을 그대로 찬양하지 않고, 그 결정의 위험성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꿈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는가, 여성의 선택은 어디까지 자율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또한 군중의 소문을 그대로 믿고 딸을 내쫓은 진평왕의 선택은 오늘날의 시선에서 더욱 날카롭게 해체된다. 학생들은 이를 가짜 뉴스와 혐오의 확산이라는 현대 사회의 문제와 연결시키며, 권력자의 판단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나아가 거짓 노래와 소문을 통해 선화공주를 차지한 서동 역시 로맨틱한 영웅이 아니라, 정보 조작의 가해자로 비판적 재해석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삼국유사의 여성들은 더 이상 순종적이거나 신비로운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선택하고, 실수하고, 질문받으며, 오늘의 윤리와 감각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인다. 신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사유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언어가 된다.
이쯤 되면 다시 조용히 묻게 된다. 삼국유사는 과연 끝난 이야기일까. 오히려 학생들의 프로젝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이 여전히 새로운 질문을 낳고,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현재진행형 신화라는 사실이다. 삼국유사는 지금도 교실 한가운데에서, AI와 함께,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빌려 계속해서 다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