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납치극을 생각하며
유튜브 신화노트에 활용된 납치되는 수로부인
수로부인은 얼마나 예뻤을까.
이 질문은 언제나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로 돌아온다. 누군가를 ‘빼앗기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힘은 얼굴의 윤곽보다,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그를 바라보는 시대의 욕망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강릉 태수 순정공의 아내다. 왕비도 아니고, 공주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록 속에서 반복해서 보이는 여성이다. 해가(海歌)와 헌화가(獻花歌)는 모두 수로부인을 향한 노래다. 바다의 존재들이, 산의 존재들이, 인간 아닌 것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말을 건다. 이것은 미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여성에 대한 호출에 가깝다.
해가에서는 용이 나타나 그녀를 데려간다. 헌화가에서는 한 노인이 절벽의 꽃을 꺾어 바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장면에서 수로부인이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소리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며,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자연과 노래가 그녀를 대신해 말한다. 이 침묵은 수동성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중심에 선 존재의 태도처럼 보인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식사 때마다 밥을 하지 않는 미시족’이라는 기록이다. 이것은 단순한 풍속의 묘사가 아니라, 일상의 노동에서 벗어난 여성, 다시 말해 제의에 속한 여성의 흔적으로 읽힌다. 밥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생존 노동에서 빠져 있다는 뜻이고, 대신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암시다. 무녀, 혹은 제의의 매개자. 수로부인을 둘러싼 모든 상상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이야기가 놓인 시점은 37대 성덕왕 때다.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이 시기는 가뭄과 재해가 잦았던 시기와 겹친다. 자연이 말을 멈춘 시대, 비가 오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자연과 대화할 존재를 찾았을 것이다. 그때 떠오른 얼굴이 수로부인이었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얼굴이 아니라 비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척, 자연이 응답할 것 같은 몸의 감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김동리와 서정주 같은 작가들은 수로부인을 무녀로 상상했다. 용에게 납치되는 여인이 아니라, 용과 교섭하는 존재. 제물처럼 끌려간 여성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신해 자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 사람. 이 상상은 단순한 문학적 변주가 아니라, 『삼국유사』의 여백을 가장 설득력 있게 채운 해석이기도 하다.
요즘 겨울 가뭄이 극심하다. 경북과 경남의 강수량은 평년의 1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뉴스 화면 속 갈라진 땅을 보며 문득 수로부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 앞에서 무력하고, 여전히 누군가가 대신 불려 가 주기를 바라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AI로 수로부인을 다시 만들 때, 나는 망설인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용에게 끌려가는 여인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파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담대한 얼굴을 선택할 것인가.
아마도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남긴 힌트는 분명하다.
수로부인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녀는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남고, 노래는 이어진다.
수로부인이 얼마나 예뻤는가를 묻는 대신,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 시대 사람들은 왜 하필 그녀를 자연의 한가운데로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