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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66년 10월 26일
병인양요, 문수산성 전투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세 번째 장면

by 박재한
1866.10.26 병인양요 문수산성(갑곶진) 전투, 전쟁기념관, 공공누리 1윻여.jpg
1866.10.27 병인양요 ,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윻여.jpg

<병인양요 상상화, 전쟁기념관 공공누리 1 유형 / 병인양요 전개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 유형>


1860년대에 이르자 처음 보는 신기한 배들이 조선 앞바다 근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양선 출몰) 또한 조선 안에서는 천주교라고 불리는 외국에서 날아온 종교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종교와 이양선의 출몰과 더불어 외세에 의해 무너지는 청나라를 보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1864년 3월에 어느 날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베르뇌에게 천주교의 자유와 러시아 진출 견제에 대한 거래를 암약적으로 제시했으나 베르뇌 주교는 거절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대원군은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고, 결국 보복조치로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을 행하게 된다. 때는 1866년이다. 66년부터 시작된 탄압으로 프랑스인 사제 12명 중에서 9명이 순교했으며, 대략 8000여 명의 천주교를 믿는 조선인이 기간에 순교했다. (1)


살아남은 프랑스인 사제 중 한 명인 리델은 중국으로 건너가 로즈 프랑스 함대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발발한 전쟁이 바로 병인양요이다. 병인양요 중 하나의 전투인 문수산성 전투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기록으로 나와있다. 프랑스군의 로즈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앙리 주앙(M. H. Jouan)은 문수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수산성은 강화행의 갑곶진의 강 건너편에 위치해 있으며 두 지점의 거리는 170-200m에 불과했다." 앙리 주앙 참모장이 바라본 이후의 전투 경과는 다음과 같다. 1차 정찰은 50여 명의 소규모 인원으로 정찰을 했으나 농민만 만났다. 2차 정찰은 제3군단 소속 2개의 소대가 상륙을 시도했다. 문수산성의 문을 25 걸음 남겨두고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집중적인 사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피해를 입었다. 소총병 1명이 즉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총검을 앞세워서 다시 돌진하였다. 조선군 수비대는 고지대로 후퇴하였으나 계속 사격하였다. 한성근 장군과 조선군은 후방에 있던 정규군 500-600명과 합류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문수산성 전투로 인하여 3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또한 장교 5명을 포함해서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프랑스군이 죽은 전투는 이 문수산성 전투가 처음이었다.


병인양요를 통해 우리는 프랑스가 외규장각의 도서를 약탈했다고만 알고 있다. 하지만 도서 문화재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은괴가 담딘 19개의 상자를 가져갔다. 당시의 가치로 약 200,000 프랑이라고 한다. 이 전쟁을 겪으며 프랑스는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침략전에는 녹슨 칼과 몇 자루의 화승총, 녹슨 대포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강화도를 점령하며 여러 가지를 새로 알게 되었다. 당시 강화도에만 1 만정의 새 화승총이 이었으며 수많은 칼, 활, 화살과 갑옷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탄약도 풍부히 비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자국(프랑스)의 군대가 너무 적어 점령이 불가능하고, 겨울이 와 보급이 끊길 우려가 있다고 하며 서울로의 진격을 포기한다. (2)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피를 흘리는 각오로 나라를 지켜낸 것이다.


(1) 김원모. (2025.11.06). 병인양요(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Jouan, H. (1871). L’expédition de Corée en 1866: Épisode d’une station navale dans les mers de Chine. Mémoires de la Société nationale académique de Cherbourg, 10, 14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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