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1865년 4월 26일
경복궁 중건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두 번째 장면

by 박재한
1865 경복궁 중건 사진은 1920년대로 추정 국립문화재연구원_5143_조선고적도보10_이미지_0001_id5116_경복궁광화문전경.jpg
경복궁 배치도.jpg

<1920년대의 광화문, 국립문화재연구원 공공누리 1 유형 / 북동궐도, 국립문화재연구원 공공누리 1유형>


높은 건물들 사이 수백 년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즈넉한 궁궐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 궁궐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면서 한국의 모든 비극적인 모습을 말없이 그저 지켜보았다.


1865년 4월 26일 경복궁 중건을 공식적으로 명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조선의 정치를 되살리고 완전히 망가진 왕권을 강화하여 아들 고종의 힘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너진 경복궁의 모습이었다. 1865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복궁은 폐허 그 자체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에 경복궁이 불 탄 이후로 1865년까지 약 300년 동안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있었다. 조선의 법궁이자 한양의 중심인 경복궁이 불탄 채 300년 가까이 방치된 이유는 다름 아닌 재건 비용일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법궁을 다시 새우는 것이 왕실을 다시 바로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로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게 된 추진력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날이 바로 1865년 4월 26일 그날이다. 돈이 부족한가? 세금을 거두면 된다. 같은 해의 4월 29일 원해서 납부한다는 원납전이라는 세금을 만들어 10만 냥을 거두었다. 나중에 원납전을 얼마나 거두었는지 모아보니 750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 (1)


사실 경복궁 중건은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자금성이 약 8,886칸이라고 하는데 경복궁은 중건 당시 약 7,225칸이었다. 지금은 일제의 의도적인 훼손으로 인하여 근정전, 경회루를 비롯한 주요 건축물을 제외하고 거의 없어진 상태다. 중국과 조선의 규모를 비교한다면 법궁의 크기가 대단히 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무리해서 많은 예산과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사는 순조로이 진행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이 법궁이 바로 서는 그날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일이 발생했다. 때는 1866년 4월 19일이었다. 1년 동안 공들여서 만들었던 800여 칸의 경복궁이 전부 불탔다. 심지어 건축물을 만들려고 준비해 놓았던 목재까지 전부 탔다. 1867년 3월 29일 경복궁 영건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두 타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대화재로 인하여 경복궁 중건의 큰 차질이 발생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강행했다.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당백전이라는 높은 가치의 화폐를 발행하여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민심을 끝없이 하락시켰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1868년 8월 10일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많은 백성들이 왕실을 향해 등을 돌렸고, 조선이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경제 붕괴를 맞이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경복궁은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1) - 成大慶,《大院君政權性格硏究》(成均館大의 博士學位論文, 1984), 87쪽-

keyword
이전 01화1.1864년 1월 21일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