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는 사람
밤새 뒤척였다.
눈을 감을 때마다 아이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뒤척이다 보니 새벽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막 날이 밝아오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갔다.
마침 박선옥 씨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줄에 걸린 옷자락들은 바람에 당겨져 흔들렸고, 그녀는 힘주어 털며 말했다.
“일찍 일어났네요. 이것 좀 봐, 바람이 이렇게도 성질이 고약해. 다 말랐나 싶으면 또 날려버리고, 다시 걸어야 한다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천이 괜히 눈에 오래 걸렸다.
아침밥을 거르고, 논둑 사이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바람이 스며들었다.
골목 끝에서 자전거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아이들이 서로 앞서겠다며 달려 나가다 모퉁이에서 와르르 넘어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울지 않고 일어나 먼지만 툭툭 털고 다시 신나게 달려갔다.
발길이 저절로 멈췄다. 저 아이들 사이에 내 아이가 있었다면 앞서 달리며 손을 흔들었을까, 아니면 뒤처져 헉헉거리며 쫓아가기 바빴을까. 그런 상상이 발목을 붙들었다.
“여기 사는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허리가 굽은 어르신이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얼굴이 어째 낯선데… 새댁 같아 보이네. 애 엄마 얼굴이구먼. 우리 손주뻘 같은데?”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어르신은 천천히 다가와 말을 이었다.
“전에도 새댁 같은 사람이 몇 있었어. 바람 쐬러 내려왔다가 정들만하면 다시 올라가더라고. 사람 마음이란 게 그래. 잠시 머물러도 막상 떠나면 또 그리워져.”
어르신은 지팡이 끝으로 흙길을 툭툭 두드리며 걸어갔고, 풀잎들은 바람을 따라 한동안 흔들렸다.
카페 문을 열자 창가로 기운 빛이 길게 흘러들었고, 태석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증기 소리가 퍼지고 향이 잔뜩 번지는 오후, 외지인으로 보이는 손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와이파이 비번 뭐예요?”
“없습니다.”
“아니, 요즘 어디 가도 다 있는데… 참 불편하네.”
손님은 커피를 받아 들고도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가격은 또 왜 이렇게 비싸? 시내랑 똑같네.”
태석은 묵묵히 컵만 닦았고, 손님은 잔돈을 챙겨 나가면서도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카페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커피 내리는 소리만 이어졌고, 나는 웃음을 삼키지 못해 입술 끝이 흔들렸다.
태석이 고개를 들었다.
“재밌었나요.”
“네, 조금.”
“여긴 원래 그렇습니다.”
말은 거기서 끊겼지만, 커피잔을 감싼 손끝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오래 남았고, 창밖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유리창을 흔들듯 스쳐 지나갔다.
저녁상에는 된장찌개와 몇 가지 반찬이 놓였다. 박선옥 씨가 찌개를 덜어주며 말했다.
“풋고추가 요즘은 맵지도 않고 맛도 없네. 햇고추가 아니라 그런가.”
태석은 묵묵히 밥알을 씹었고, 박선옥 씨의 아들은 계란말이만 집었다.
“이 집은 늘 똑같아. 반찬도, 분위기도.”
툭 던진 말에 박선옥 씨가 눈을 흘겼다.
“싫으면 나가서 사 먹어.”
“아니, 맛없다는 게 아니라… 똑같으니까 편하다고.”
아들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나는 잠시 숟가락을 만지다 결국 말을 꺼냈다.
“서울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박선옥 씨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이구, 며칠 더 계실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어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아이가 전남편과 지내는데, 자꾸 저를 찾는다고 해서요. 얼굴이라도 보여주고 와야 할 것 같아요.”
식탁 위가 고요해졌다. 태석이 고개를 들며 짧게 말했다.
“멀리 있어도,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죠.”
박선옥 씨는 국을 젓는 숟가락질을 멈췄고, 그녀의 아들은 밥알을 흩으며 고개를 숙였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현관문이 열리고 캐리어 바퀴가 마룻바닥을 긁었다. 박선옥 씨가 반갑게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요. 방 예약하셨죠?”
고개를 돌린 순간, 숨이 멎을뻔했다. 이곳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박선옥 씨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태석의 표정도 굳어졌다. 방 안 공기조차 단단히 얼어붙었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 막 솔향집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방문자와 나의 얼굴만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