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저녁의 틈
“안녕하세요.”
익숙한 얼굴이 식탁 앞에 서 있었다.
전남편 회사 가족모임 자리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를 단번에 알아보는 눈빛은 선명했다.
“급히 묵게 됐어요. 원래 이모네 집에 가려 했는데 방이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여기서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네요.”
박선옥 씨가 내 표정을 살피며 여자에게 열쇠를 건넸다.
“마침 빈 방이 있네. 오늘은 여기서 자.”
밥상 위 반찬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식어 갔고, 젓가락만 허공을 맴돌다 내려앉았다.
밤이 깊자 집 안은 조용해졌다. 현관 앞 벤치에 앉은 그녀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여보, 나야. …응, 잘 왔어. 근데 오늘 좀 이상했어. 윤호 엄마를 여기서 봤어. 혼자 지내더라.”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창문 너머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그녀의 반대편 쪽에선 태석이 등을 돌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가 금세 끄고 발자국 소리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다 커튼을 당겼다. 눕기는 했지만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아침이 오고 식탁에 다시 둘러앉았을 때도, 밥은 여전히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박선옥 씨가 김치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더 먹어. 금세 허기져.”
“네…”
맞은편의 그녀는 짧게 미소만 지었고, 태석은 묵묵히 밥만 씹었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집 안에 퍼졌다. 불편함 때문인지 도통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전화 통화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괜히 바깥으로 나왔다.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동네 길을 걷다 작은 분식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김밥 한 줄과 라면을 시켜 창가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부부가 서로 반찬을 덜어주며 웃고 있었다. 사소한 동작들이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잊고 살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연애 시절, 그는 가끔 퇴근길마다 나를 불러내 김밥 한 줄을 나눠 먹으며 “세상에서 이게 제일 맛있다”고 웃었다. 결혼 뒤에는 같은 분식집 앞에서 “이런 데서 뭘 먹냐, 집에 가서 제대로 차려 먹지”라며 차갑게 돌아섰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라면과 김밥이 눈앞에 차려졌지만, 그때가 생각이 나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의 사랑도, 사람도 이젠 모두 없는 것들이 되어 버린 현실이 오늘도 나를 아프게 하고 있다.
마음도, 생각도 추스러지지 않아 걷고 또 걸었다. 이미 걸어온 길을 다시 걷고, 그러다 지치면 잠시 서서 먼 하늘을 바라봤다. 몸을 계속 움직여야 마음이 덜 힘들 것 같았다.
돌아오니 집 안은 이미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김치전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부엌을 채우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얼굴들 사이로 말은 거의 오가지 않았다. 그녀는 젓가락을 느리게 움직였고, 태석은 여전히 묵묵했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싱크대 옆에서 박선옥 씨가 낮게 말을 꺼냈다.
“저기… 뭐라 불러야 되나, 아무튼… 혼자 지내는 거 쉽지 않았을 거야. 요즘은 다들 사는 게 복잡하다지만, 그 일은 쉬운 게 아니잖아... 아까 그렇게 나가고 저기 저 애기엄마가 그러더라고, 괜히 자기가 여기 와서 다들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이제 짐 챙겨서 바로 간다고 하네 ”
손에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짧게 대답했다.
“… 남편 쪽에서 먼저 얘기했어요. 부모님 편을 들면서… 결국 그렇게 됐죠. 저 여자분, 남편이랑 친한 직장동료의 아내분이에요. 몇 번 뵌 적 있어요. 저도 저지만, 아마 저분도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박선옥 씨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밤이 오기 전에 카페에 들렀다. 태석은 커피를 내리다 말고 눈길만 건넸다. 잔이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두 손을 모았다.
문이 열리며 떠난 줄 알았던 그녀가 들어왔다.
“병원에 가려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요. 근처에 카페가 괜찮다고 해서 잠깐 들렀어요.”
태석은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시선은 곧장 내 쪽으로 향했다.
“사실… 남편 통해서 소식 들었어요. 윤호 얘기도 조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모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모부가 많이 편찮으시기도 하고, 제가 자기에는 마땅치가 않아서 이모 소개로 하루 묵게 된 거예요. 저 때문에 불편하고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나는 애써 웃음 지어 보이며, 시답잖은 안부와 조심해서 가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라떼를 들고나가자 카페 안이 고요해졌다. 식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한숨이 흘렀다.
그때 태석이 낮게 말했다.
“굳이 받아줄 필요 있었나요.”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얼굴은 무심했다.
“저는 그냥… 웃고 넘어가려던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잔을 닦는 손놀림만 묘하게 더뎠다. 가슴 한구석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기 위해 한 이혼이 오히려 나를 더 메말라 죽어가게 하는 것 같았다.
웃고 살던 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꽤나 오랫동안 시리고 시린 인생의 겨울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