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돌아갈 수 없는 자리
새벽같이 일어나 서울로 갈 준비를 했다. 아이를 만날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전남편과 그의 가족들을 마주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아직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시간.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왔다. 소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태석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더니 나에게 건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감정이 격해질 땐 휴게소나 졸음쉼터에서 쉬다 오시고요. 그럴 땐 운전대 잡으면 안 되거든요. 아이 앞에서 울면 안 되니까 이 손수건도 챙겨가시고요."
나는 그의 배려와 걱정 섞인 말에 옅은 웃음으로 대신 대답하고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전남편이 보내준 주소를 내비에 찍고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 이제 다섯 시간 뒤면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 서울로 향하는 동안 어두웠던 새벽하늘이 밝은 빛으로 가득 채워졌고, 가는 내내 아이 생각에 들떠있었다.
유치원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강당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학부모와 조부모들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구석에 조용히 서서 무대 커튼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작은 무대 위에 윤호가 올라왔다. 작은 몸을 앙증맞게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율동은 서툴렀지만, 내 눈엔 그 어떤 공연보다 눈부셨다. 아이의 눈이 내 쪽을 찾아와 멈췄다. 웃음이 번진 얼굴이 가슴을 후벼 팠다.
행사가 끝나자 윤호가 달려왔다.
“엄마!”
작은 몸이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 힘에 숨이 막히면서도, 놓고 싶지 않았다.
“엄마! 같이 가자. 응? 오늘은 같이 가면 안 돼?”
윤호의 손이 내 옷자락을 붙들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아이 눈을 마주했다.
“윤호야, 엄마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오늘은 아빠랑 가야 해.”
“싫어. 엄마랑 있을래.”
작은 목소리가 떨리더니 곧 눈물이 고였다.
아이의 손이 점점 더 세게 내 팔을 움켜쥐었다.
전남편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고, 시부모는 한쪽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시선이 서서히 몰려왔다.
그때 시어머니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엄마 노릇도 못 하던 사람이 괜히 나타나서 애 혼란만 주네.”
시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말리진 않았다. 전남편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맞받았다.
“저, 잘못한 거 없어요. 윤호 제가 키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그러셨잖아요. 윤호 부족함 없이 키우겠다고. 저랑 있으면 애가 하고 싶다는 거 마음껏 못 할 거라고... 그래서 울면서 보낸 거예요.”
말끝이 갈라졌다. 윤호는 눈물범벅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엄마, 정말 또 올 거지?”
나는 아이를 한 번 더 꼭 안아주고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럼. 엄마가 꼭 올게. 우리 윤호, 예쁘게 인사하고 가자.”
윤호는 훌쩍이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엄마. 또 와.”
나는 억지웃음을 띠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 또 보자. 엄마가 꼭 갈게.”
전남편이 윤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걸어갔다. 작은 손이 공중에서 흔들리다 서서히 사라졌다. 아직 단체 공연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서둘러
나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 창밖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에는 여전히 윤호의 울음이 메아리쳤다. 작은 손으로 내 팔을 붙들던 감각이 아직도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다온골에 도착하니 밤공기가 차가웠다. 솔향집으로 가기 전, 태석의 카페로 먼저 향했다. 내가 카페로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석이 카페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가슴 끝까지 차오른 눈물이 숨을 막았다.
태석은 말없이 따뜻한 종이컵을 내밀었다.
“뜨거울 때 마셔요.”
컵을 건네받은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아이를 만나고 오니…세 식구가 살던 그 집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리 같아요.”
태석은 조용히 내 옆에 섰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
“여기선…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를 만나는 날에만 서울에 다녀오고, 그 이외에 날들은 이곳에서 지내야겠다고, 오는 동안 그런 생각들을 했다. 서울집은 하루빨리 정리하는 편이,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게 더 낫겠다는 결론이 섰다.
밤하늘에 별이 번졌다.
내 결심도, 그만큼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