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소문이 도는 속도
아침 공기는 더 이상 가을의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창문을 열자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방 안을 훑었다.
햇살은 여전히 맑았지만, 그 속에는 초겨울의 냉기가 섞여 있었다. 솔향집 뒷마당의 나무들은 잎을 거의 잃어버렸고, 빨랫줄만이 바람에 흔들렸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의 끝에서 초겨울로 건너가고 있었다.
책상 위 노트북에는 교정 파일이 열려 있었고, 커서는 제자리에서 깜빡였다. 집중하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엄마’ 두 글자가 떴다.
“윤호 자주 못 보고 있지 너, 애는 무슨 죄니.”
익숙한 말투였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쉽지 않아.”
짧은 정적 뒤, 결론이 따라왔다. 엄마만의 결론.
“그러게 네가 참았어야지. 애 옆에서 버텼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이혼을 결심했을 때도, 엄마는 내 편이 아니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엄마 때문에 더 힘들어. 위로가 아니라 상처야. 그런 말 할 거면 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뚝, 통화가 끊겼다.
방 안의 공기는 고요했지만, 오히려 숨이 깊게 들어갔다.
마치 오래 묶여 있던 매듭을 스스로 풀어낸 듯했다.
점심 무렵,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갓 구운 빵 냄새와 진한 커피 향이 동시에 밀려왔다.
“왔어요.”
태석이 밀가루 묻은 앞치마를 정리하며 웃었다.
“네, 빵도 구우시나 봐요.”
“네, 종종 찾는 분들이 있어요. 선영 씨 오고는 처음 만드는 것 같네요. 이전에도 한 번씩 만들어서 팔았거든요.”
태석이 멋쩍게 웃었다.
창가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눈앞에 활자를 붙잡아가며 일을 해 나갔다.
예전 출판사 시절이 문득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밤늦게까지 교정지를 넘기던 사무실, 사소한 단어 하나에도 편집장이 눈썹을 찡그리던 순간들. 지금은 혼자지만, 여전히 그 길 위에 있다는 생각이 위안처럼 다가왔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태석이 물었다.
“문장이 잘 풀리나요?”
“네, 익숙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막히는 부분은 늘 있네요.”
그는 잠시 웃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군더더기는 누구에게나 생겨요. 오래 바라보는 눈이 있으면 결국 걸러지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카페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문장에 익숙한 어투였다. 순간 의아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 귓가를 스치는 말들이 흘러 들어왔다. 꽤나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 말들.
“서울서 내려왔다잖아.”
“애도 있다며? 요즘은 저 사람이랑 같이 다닌대.”
낯선 얼굴들이 모여 고개를 맞대고 웃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동네 여자들 같았다.
소문은 언제나 가볍게 떠올라 무겁게 내려앉는다. 손끝이 다시 굳어졌다.
태석이 잔을 정리하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 얘기, 담아두지 마요. 여긴 원래 그렇습니다. 오늘은 우리 얘기지만, 내일은 또 다른 사람 얘기예요.”
“근거 없는 말이 사실처럼 굳는 게 더 화나요.”
내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그는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히 덧붙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드러납니다. 선영 씨를 아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무슨 뜻일까... 위로 같기도 하고, 시험 같기도 한 말이었다.
늦은 밤, 솔향집의 방 안은 고요했다. 이따금씩 바깥에서 박선옥 씨의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낮에 들었던 소문이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써 외면했다. 그때 휴대폰의 불빛이 깜빡였다. 후배의 메시지였다.
_선배, 이번 교정 너무 꼼꼼해서 편집장님도 놀라셨어요. 다음 달 원고도 잘 부탁해요._
나는 화면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이 일만큼은 나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씻어둔 텀블러를 가지러 주방으로 나갔다. 마침 카페 영업을 끝낸 태석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일 시장에 같이 갈래요? 포장재를 사야 해서요.”
다짜고짜 같이 시장에 가자는 그의 말에 당황했지만 딱히 할 일이라곤 종일 노트북을 붙잡고 있는 것뿐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근데요, 동네사람들이 시장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더 수군거리는 거 아니에요? 아까 카페에서처럼..."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태석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 사는 동네라면 어디가 됐든 소문에는 발이 달리죠. 뭐 어때요. 우리가 아니면 된 거죠. 원래 남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 도시든 시골이든 있잖아요. 저는 익숙해요. 하도 시달려서 덤덤해졌거든요."
그의 말에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내가 다온골에 오지 않고 줄곧 서울집에 살았어도, 소문의 내용만 다르게 또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내 귀에 들어왔을 거다. 신혼살림부터 시작해서 이혼할 때까지 살던 곳이라 윤호 친구네 가족은 물론이고 아는 사람이 꽤나 많았으니 말이다. 물론 내가 떠나 온 지금도 나는 없지만, 나와 전남편을 둘러싼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퍼져가고 있을게 분명하다.
"시장에 가면 문구점도 있을까요? 일 하다 보니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어서요."
"시골이어도 문구점은 있죠. 그럼 내일 카페는 오후 오픈으로 하고, 아침 식사 후에 다녀올까요?"
"네,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아침에 다시 뵐게요. 쉬세요"
태석은 인사대신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방으로 돌아와 밀린 일들을 해 나갔다. 태석의 말대로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가됐든 소문이 돌기 마련이다. 나만 아니면, 나만 당당하면 그게 다 뭐라고... 역시나 내면부터 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곧 결심이 되었다.
그 밤, 아주 오랜만에 또 그 꿈을 꾸었다.
솔향집에서의 첫날, 무너지기 직전의 나는 꿈속에서 누군가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꿈이었지만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고, 우는 나를 말없이 안고 토닥여주던 그 손길을 한동안 계속 생각했다. 너무나도 따뜻했던 꿈이었기에.
이번엔 갈대가 흔들리는 들판에 앉아있었다.
지는 해를 보며. 꿈이지만 여전히 나는 힘든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우는 대신 멍하니 하늘만
보고 또 봤다.
'마음이 유난히 추운 가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간가가 등 뒤에서 자신의 겉옷을 덮어줬다.
그리고는 옆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손으로 등을 토닥여줬다.
순간, 분명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그 손길의 따뜻한 느낌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그 사람이다. 우는 나를 말없이 안아주던...'
여전히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지는 노을빛에 가려져 그저 희미한 옆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자세히 보려고 할수록 더 희미해지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온통 지난밤에 꾼 꿈 생각뿐이었다.
'내가 너무 심신이 지쳐 꿈에서라도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한 걸까?'
분명한 건, 꿈일지라도 나는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큰 위로를 받고 있었고, 현실에서도 조금씩 회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겉과 속 모두 단단한 윤호 엄마이자 최선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