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13. 나와의 약속

by 구혜온

모든 걸 정리하고 다온골에 정착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그동안 갑갑했던 속이 뚫리는 것 같았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전남편과 시댁식구들을 보면서 그 결심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가족일 수 없고, 나 역시 그들과 다시 가족으로 지낼 수 없음을 안다. 가장 미안한 건 아이다. 윤호에겐 그 어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미안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주부로만 생활했고, 이혼과 동시에 친정과도 연락을 끊은 나로서는 혼자서 아이를 키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 미운 사람들이지만 시댁과 전남편의 경제 사정은 매우 넉넉하니까, 그리고 아이에게는 더없이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이니까 그들이 아이를 양육하는 게 지금 생각해도 맞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음먹은 이상 바로 실행해야겠다 싶었다. 몸은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얼른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해가 뜨기도 전에 차를 몰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정확히는 서울 집으로.


몇 주만에 오는 집인데 마치 몇 년 만에 오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거실은 깨끗했다. 나갈 때 모습 그대로였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은 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살고 있지 않은 곳. 나와 내 아이가 웃고 뒹굴고 행복을 꿈꾸던 이 집에 더 이상 나도 아이도 없다.


싱크대 위에는 남겨둔 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냉장고 문에는 윤호의 사진이 몇 장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우리 셋이 가족일 때 여행을 다니며 사 모았던 마그넷 다섯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안방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각종 공과금 고지서와 병원 영수증, 윤호가 그린 자동차 그림. 다시금 가슴이 저려왔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네, 매물 접수 가능 하신가요?... 네, 지금 집은 비어 있고요. 서류는 메일로 보낼게요. 집 사진은 오늘 찍어서 드릴 수 있어요. 짐은 2~3일 내로 뺄 거라서 그 이후에 현관문 비번 알려드릴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을 때 손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이제 정말 정리를 하는구나.'


인터넷으로 솔향집을 검색해 전화번호를 찾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온지라 전화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주머니, 최선영이에요."

"아니. 아침에 일어났는데 방에도 없고, 차도 없어서 놀랐잖아, 아예 간 건가 하고."

"아니에요, 서울 집을 정리해야 해서 일찍 왔어요. 한 2~3일 정도 있다가 내려갈 것 같아요."

"아주 정리하고 오시는 건가?"

"네, 저 당분간은 솔향집에서 지내면서 주변에 월세나 전세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아유, 그런 걱정은 말고. 월세라면 우리 집도 나쁘진 않지. 아무튼 편하게 일 보고 와요."


솔향집에 처음 도착한 날, 서랍장에 있던 작은 노트에 적혀 있던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여기선 잊는 법부터 배워요'

그 말이 자꾸만 잊히지가 않는다.


나는 이제 돌아가서 힘들었던 기억들을 잊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이혼을 하고 양육권까지 정리가 되면서 전남편과 아이의 짐은 진작에 다 나간 상태라 이 집에 있는 짐은

것뿐이다. 버릴 건 버리고 가져갈 것만 추리면 된다.


이틀간 밤 낮 구분 없이 짐을 정리했다. 필요한 살림살이 조금과 옷들은 박스에 잘 정리했다.

커다란 가전은 중고가전을 취급하는 곳에 판매하고, 가구는 깨끗이 사용한 것들이라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필요하면 쓰라고- 부동산에 얘기해 두었다.


커다란 박스 다섯 개. 다 정리하고 나니 남은 내 것은 그게 전부였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차에 다 들어가지 않아 택배로 보냈다. 아마 내가 다온골에 다시 돌아가는 날에 맞춰 택배도 도착할 것이다.


텅 빈 집을 보니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아이를 만나는 날에만 서울에 오면 된다. 다행히 전남편 쪽에서 면접교섭권은 잘 이행한다고 약속했다. 아이를 위해서.


서울 집에서 정신없는 2박 3일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집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내가 결혼을 해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윤호를 낳아 키우던 잊을 수 없는 공간. 행복한 시간만큼 아픔의 시간도 공존했던 애증의 공간. 나는 이곳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온골로 향하며, 후련함 때문인지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자꾸만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엉엉 울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도 강해져야 한다. 단단해져야 한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

다행히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는 곳이 있으니 그 일을 열심히 하며 예전처럼 밝은 모습들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약하고 힘없는 엄마가 아니라, 강하고 능력 있는 엄마가 되어 아이와 다시 마주하고 싶다. 그게 지금 내가 품고 있는 단 하나의 꿈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솔향집 마당에 주차를 하니, 시간은 벌써 저녁 여덟 시다. 저녁 먹을 시간을 놓쳤다. 차에서 내리는데, 마침 태석이 카페 문을 닫고 들어오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께 들었어요. 서울집 정리하러 다녀오셨다고요."

"네, 그날, 그렇게 태석 씨랑 얘기하고 밤새 고민하다가 새벽 일찍 서울로 다시 갔어요. 마음먹은 김에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빨리 정리를 하실 줄은 몰랐어요. 너무 힘드실 텐데..."

"아니요. 하루라도 빨리 정리를 하는 게 저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맞는 것 같더라고요."


태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혹시... 이 상황에 뜬금없긴 하지만, 식사하셨어요? 도착하고 보니 여덟 시라..."


태석이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아, 아니요. 저도 저녁 손님들이 갑자기 몰려서 이제 막 정리하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저번에 그 칼국수 집은 아마 영업이 끝났을 거예요. 차로 한 15분 정도 나가면 늦게까지 하는 곳이 있던 것 같아요."

"그럼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지난번에 제가 얻어먹었으니까, 이번엔 제가 살게요."

"하하. 네, 그럼 이곳 지리는 아무래도 제가 더 잘 아니까 제 차로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네"


가는 동안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태석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의미 없는 말들과 음악 소리를 들으며,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족도 없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오늘부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부디 몸도 마음도 생각도 단단해져서 멋진 엄마의 모습으로 윤호와 마주하자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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