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상처와 마주하기
아침 식사를 하기 전 제법 춥기까지 한 가을 끝자락의 바람을 맞으며 마을 산책을 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마을 곳곳에는 이미 많은 어르신들이 나와계셨다. 서울에서 온 애기엄마 아니냐며 먼저 말을 걸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어르신들도 계셨다.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마도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이혼 후 솔향집에 와 가장 좋은 건 밥 차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주부로서 아이 엄마로서 살 때에는 하루 삼시세끼 걱정으로 머리가 아팠는데, 솔향집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밥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여기서 묵는 숙박비에 식사비도 포함이 되어 있지만, 도시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는 점이 여유롭지만은 않은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지난밤 꾼 꿈에 기분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아직 심적으로 안정이 되고 정리가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매일매일 나아지는 내가 되고 싶다.
아침 식탁에는 김치찌개와 고등어, 오이소박이와 계란말이가 올라왔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싶었다. 하지만 박선옥 씨의 아들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엄마가 아는 찌개는 된장찌개랑 김치찌개밖에 없는 거야? 아니 뭐, 고추장찌개도 있고 찾아보면 많지 않아요? 국은 종류별로 잘 끓이시면서 어째 찌개는 이 두 개만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르겠네."
박선옥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네가 일찍 일어나서 차려보든가. 아니면 너네 식당 출근해서 거기서 아침 드시면 되겠네. 아침부터 굽고 끓이고 고생한 엄마한테 그게 할 소리냐? 너, 나중에 결혼해서 그러잖아? 요즘세상에 그러면 쫓겨난다, 이놈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나는 맛없다고는 안 했어요. 또 저러시네. 잘 먹겠습니다. 봐요, 잘 먹잖아요."
두 모자의 투닥거림에 나와 태석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느 집에서나 있을법한 정겹고 따뜻한 모습. 우리는 겪지 못할 그 모습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태석의 차를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박선옥 씨도 뒷좌석에 동행했다. 시장에서 누굴 좀 만나기로 했는데, 아들이 태워다 주지 않는다며 태석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가는 동안 차 안에는 박선옥 씨의 목소리만 배경음악처럼 울렸다. 쉬지 않고 말하는 통에 우리는 말을 할 새도 없었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 계속 망설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마을 사람들이 떠드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박선옥 씨는 이내 말을 다시 삼켰다. 나도 태석도 그 모습을 보았지만 구태여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장 입구에서 박선옥 씨는 태워다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아갔다.
태석은 카페에 필요한 포장재를 사러 두어 곳에 들렸고, 그 사이 나는 태석이 알려준 문구점으로 향했다.
작지만 그의 말대로 있을 건 다 있었다.
노트 두 권과 볼펜, 포스트잇, 형광펜, 샤프, 지우개 등 애초에 사려고 했던 것보다 더 많이 담게 되었다. 집에서는 생각나지 않던 것들이 문구점에 오니 '나도 데려가야지'라며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다 사고 밖으로 나오니 태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전화를 주시면 제가 빨리 일을 보고 나왔을 텐데요."
"네, 근데 제가 선영 씨 번호를 모르는데 어떻게 전화를 하나요? 나올 때 되면 나오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람 구경도 하면서요."
생각해 보니 우리는 종종 많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 누가먼저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왜였을까.
아마도 솔향집에서 매일같이 마주치기 때문에 굳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나도 태석도 말이다.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어차피 들어가도 점심밥은 각자 해결해야 하니, 시장에서 먹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저는 가리는 음식은 없어요. 웬만한 건 다 잘 먹어요."
"그럼 혹시 순댓국도 좋아해요? 여기 장날에만 천막 치고 장사하는 국밥집 있는데, 거기 순댓국집 맛 괜찮거든요."
"저 순댓국 좋아해요. 그럼 오늘 점심은 거기서 먹으면 되겠네요."
태석의 안내에 따라 난전에 있는 순댓국 집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와 태석도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순댓국 두 그릇을 시켰다. 전남편과 결혼을 한 이후에는 한 번도 이런 곳에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연애 때는 곧잘 먹으러 다녔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혼 이후에는 분식집도, 시장도 같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결혼 후 시부모님과의 갈등이 생긴 뒤로 말이다.
"근데, 제가 진짜 태석 씨한테 전화번호를 여쭤본 적이 없네요. 매일 솔향집이나 카페에서 뵈니까 전화번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나 봐요. 말 나온 김에 알려주세요, 저장해 둬야겠어요. 혹시 알아요? 진짜 전화해야 할 때가 있을지."
내 휴대폰을 건네받은 태석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의 휴대폰에도 내 번호가 떴다.
"솔향집에 온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는데, 이제야 전화번호를 주고받네요."
그의 말에 둘 다 웃음이 터졌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밥을 먹던 중년 여성 세 명이 우리를 힐끔 거리는 게 느껴졌다.
"동네 아주머니들이에요. 뻔하죠 뭐. 소문에는 발이 달렸잖아요. 우리 둘이 시장에 왜 같이 왔으며, 왜 밥까지 같이 먹는지. 본인들끼리 추론하는 거겠죠. 안 봐도 뻔하잖아요."
"태석 씨는 괜찮으세요? 사실이 아닌 말들이 퍼져나가잖아요."
"저한테 중요한 사람들 아니라 굳이 변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뭐, 우리가 시장에 와서 같이 밥을 먹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 외에 말들은 저들이 지어낸 말들일뿐 그런 거까지 신경 쓰며 살고 싶지가 않아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분명 불쾌하지만 그들에게 구구절절 내 서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박선옥 씨를 통해 내가 이혼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다는 건 이미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나있을 거고,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것도 어쩌면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니까. 그 외에 것들은 태석의 말대로 자기들이 지어낸 말이지 사실이 아니니 그거면 된 거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그가 언제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는지, 언제 정착하게 되었는지.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대화에 주제를 붙여 보자면, '지난 과거와 앞으로의 인생 계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온골에 돌아와 태석은 카페로, 나는 솔향집으로 향했다. 지난밤 작업한 파일들을 한번 더 꼼꼼히 살핀 후 출판사에 보내야 한다. 결혼 전 수년간 하던 일이라 금방 익숙해졌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일마저 할 수없었다면 나는 매일을 폐인같이 보냈을 것이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처럼 인생의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일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피곤하지만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차근차근히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 기억이라는 게 형성되었을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테면 '요람기'같은 것.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앞으로의 계획이 더 또렷해질 것 같았다. 40여 년 가까운 시간을 글로 정리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감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시간 될 때마다 쓰면 언젠간 완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글을 다 마쳤을 때에도 나는 나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첫 기억은 네 살 무렵인 것 같다. 물론 그 이전 삶의 기억도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겠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가 꽁꽁 숨겨버린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나는 아들 귀한 집에 장녀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할머니는 엄마에게 몸조리도 할 필요 없다고 구박을 했고, 엄마가 집안일을 하거나 할머니 심부름을 간 사이 내가 울기라도 하면, 계집애가 목소리만 크다며 안아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엄마 역시 그런 할머니가 원망스러워 내가 가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둘째로 아들을 낳으면서 엄마도 할머니처럼 변해갔다.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집안의 장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애기가 조금만 울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 애기를 안고 업고 금이야 옥이야 돌보셨다고 한다. 엄마도 나를 낳은 이후에는 매일같이 구박만 받다가 동생이 태어난 후에야 몸조리도 제대로 하고, 집 안에서 할 도리 하는 큰며느리 취급을 받아서인지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동생이 울면, 할머니가 달래도 달래 지지 않으면 엄마에게 돌보게 하시고는 본인이 집안일을 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그때 동생을 보면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보내 준 금두꺼비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귀하고 귀하게 키웠다. 그럼 나는 어땠을까? 동생과 놀아주다 동생이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울면 전부 내 탓이었다. 계집애가 남동생 울린다고 할머니는 나를 그렇게나 때렸다. 주변에 엄마와 아빠가 있었지만 할머니를 말리기는커녕 우는 동생을 안고 어르고 달래기 바빴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서러움과 불공평을 먼저 배웠다. 그 차별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부모에게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전남편은 다 줄 것만 같았다. 그는 내가 출판사에 근무할 때 거래처인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인쇄소 사장님의 아들이었다. 막내 직원이었던 나는 선배들 심부름으로 자주 인쇄소에 가게 되었고, 내가 인쇄소에 갈 때마다 전남편은 항상 내 손에 뭐라도 쥐어주었다. 작은 간식거리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반지였다. 연애 때도 항상 내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먼저 물어보던 사람이었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내가 제일 귀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1년 만에 윤호가 태어났다. 정말이지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행복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아이가 태어난 후 시부모님은 매일같이 집으로 오셨다. 몸조리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오실 때마다 내가 직접 밥을 차려주길 요구하셨고,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밤새 못 자고 힘들었던 날엔 남편을 통해 오늘은 오지 않으시면 안 되나고 했을 때, 남편은 불같이 화를 냈다.
"네가 집에서 하는 게 뭐야? 나는 나가서 돈 벌어오잖아. 애 키우고 집안일하고, 밥 차리는 거 당연히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몸조리는 조리원에서 했잖아. 손주 보고 싶어서 오시는데 그 밥이 뭐라고 그래?
"내가 아주 싫다는 게 아니잖아. 윤호가 며칠 동안 밤마다 우느라 잠도 잘 안 자고, 잘 먹지도 않아서 힘들어하는 거 당신도 옆에서 봤잖아. 나도 쉬고 싶은 날이 있어. 정말 힘들어. 오늘 같은 날은 밥도 대충 때우고 집안일도 안 하고, 애 잘 때 잠깐이라도 옆에서 눈 좀 붙이고 싶어. 그게 욕심이야?"
"내가 볼 땐 욕심이고 이기적이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 우리 부모님이 해주신 거 너도 알잖아? 내 월급도 아들이니까 더 챙겨주시는 거야. 삼시세끼 다 차리는 것도 아니고, 저녁 식사만 드시고 가시는 건데, 아침부터 설렁설렁 준비해도 되는걸 너는 지금 핑계 대고 있는 거잖아."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 남도 아니고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 아이 낳고 힘들다는 와이프한테 그게 할 말인 거야?"
"됐다, 됐어. 부모님한테 오시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 며느리가 밥 못하겠으니 오시지 말랬다고. 됐어? 그거 바라는 거지?"
"내가 또 언제 그랬어? 오늘은 정말 힘드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그날부터였다. 조리원에서 퇴소하고 온 이후부터 시부모님은 아이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하루가 멀다 하고 저녁마다 집으로 오셨고, 그럼 난 힘든 몸으로 밥상을 차려야 했다. 젖몸살로 힘든 날에도 나는 눈물을 흘리며 반찬을 만들었다. 전 남편은 나를 시부모에게 불효하는 며느리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고, 나도 그런 그에게 마음이 점점 식어갔다. 윤호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우리 사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필요한 말만 나누고, 그 외에는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지난여름, 시부모님과 함께 휴가를 가자는 그의 말에 나는 반대를 했고 결국 그의 입에서 먼저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6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그의 껍데기만 보고 살았다. 남들이 볼 땐 부부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우리는 흔히 말하는 쇼윈도 부부에 그치지 않았다. 윤호의 어린이집, 유치원 행사에는 여느 부부의 모습으로 참석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남보다도 못하게 지냈다. 시부모도 나를 못된 며느리로 낙인찍고 다녔다. 시댁에는 남편과 윤호만 다녀가라고, 나는 보기 싫으니 오지 말라고도 했었다.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아이를 키워달라고 해야만 했던 내 마음은 어땠을지,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전부 알고 있던 내 엄마라는 사람 조차도. 그저 끝까지 나보고 참으라고만 했다. 내 상처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글을 써 내려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그리고 창문을 열어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했고, 그들에게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으로 복수하고 싶었다. 당신들의 관심과 사랑 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만큼 가슴에 박힌 수많은 상처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생채기를 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나는 울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로 훨씬 더 괜찮고,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이제는 내가 나를 놓치지 않고, 더 많이 안아줘야겠다고, 사랑이라는 걸 해줘야겠다고 캄캄한 밤하늘을 보며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