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18. 행복을 꿈꾸며

by 구혜온

새벽 다섯 시. 아직 모두가 잠든 캄캄한 새벽. 조용한 발걸음으로 솔향집을 나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평일 같으면 한두 시간 늦게 출발해도 되지만, 오늘은 주말이기 때문에 중간에 차가 말릴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니 쉬엄쉬엄 가려면 일찍 출발하는 편이 낫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큼은 개운했다. 다온골에 내려와 처음 윤호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났던 날엔 모든 게 힘들었다. 더 이상 밑바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모든 게 회복되어가고 있다. 마음이 가벼워서일까. 새벽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의 풍경이 더 선명하고 경쾌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휴게소에서 우동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이후 커피를 들고 다시 차에 오른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부동산에 가기로 한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휴대폰 알람을 맞추고 한 시간의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제법 개운해졌다.


부동산에 도착하니 집을 사기로 한 젊은 부부가 일찌감치 와 있었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부동산 사장님과 나란히 앉아 도장을 주고받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조금 전까지 내 집이었던 곳이, 우리 윤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이제는 새 주인을 만났다. 우리는 해피앤딩이 되지 못했지만, 새로운 주인들은 부디 그 집에서 완벽한 해피앤딩을 맞이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랬다.


윤호와 약속한 장소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전남편이 윤호의 손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반갑게 윤호와 마주했다.


"엄마! 나 오늘 엄마 온다고 그래서 어제 숙제도 다 하고, 할머니랑 아빠 말도 더 잘 들었어!"

"우와, 우리 윤호 진짜 멋있다. 엄청 씩씩해졌어. 고마워 윤호야."


나는 윤호를 품에 가득 안았다. 박선옥 씨가 그랬던 것처럼 눈물은 속으로만 흘렸다. 내가 울면 우리 윤호가 슬퍼할 테니. 우는 건 혼자 있을 때만 해야 한다. 옆에서 머뭇거리던 전남편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윤호 발표회 날. 미안했어. 엄마가 그렇게까지 얘기하실지는 몰랐어. 가기 전에 당부드렸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시부모님 문제로 산후조리 때 크게 다툰 후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늘 내 편이 아니었고, 내 탓만 했던 사람에게 나는 이혼 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리하지 못한 말도 있고... 당신한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눈물이 났지만 꾹 참았다. 우리는 윤호의 손을 잡고 카페로 향했다. 아이의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나는 아이 아빠에게 차마 화를 낼 수도, 엉엉 울 수도 없었다. 웃는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껏 들뜬 윤호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간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전남편과 나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한 참의 침묵 뒤에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디서 지내는지는... 들었어. 세상 좁지.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을까."

"그러게. 나도 생각 못했어. 그 사람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돌아가서 남편분께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당신이 알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연고도 없는 곳에... 나 때문인 거지, 그렇게 멀리까지 간 거..."

"꼭 그런 것만은 아냐. 우리는 어차피 끝났고. 우리가 살던 집에서 계속 혼자 지내면 맨날 울기나 하고. 미칠 것 같았어.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회복해 보려고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보자 하고 떠난 게 거기였던 거지."

"우리 부모님 별난 거 사실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근데, 그냥 당신한테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자식이 나 하나밖에 없다는 핑계로. 이기적인 생각으로 모른 채 했어. 끝까지 자존심 세우고 당신한테 일부러 못된 말들만 했어."

"알고 있어. 우리 3년을 만나고 결혼했어. 결혼 전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니까. 그 기억 붙잡고 살았던 것 같아. 나도 마음 문을 닫고 산 거지 과거의 당신 모습만 생각하고. 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 그냥 결혼을 하지 말 걸 그랬어. 그렇지?"

"그냥 내 잘못이지 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내 부모랑 살고 있는데. 우리 윤호는 못난 아빠 때문에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하는구나...라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자꾸만 눈에 눈물이 차 오르고, 목이 콱 막혀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망스러웠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이혼 전에, 그전에라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더라면 우리가 지금의 이 모습은 아니지 않았을까.


"앞으로 윤호 유치원이나 학교행사에 부모님 오시지 못하게 할 거야. 유치원 졸업식에도. 그러니까 전에 같은 일 두 번은 없을 거야. 마음 놓고 와. 애 보고 싶은 만큼 마음껏 보고 가고. 그날도 금방 가게 해서 미안했어. 애도 며칠씩이나 보채며 울더라고."

"고마워. 나는, 우리가 부부로는 끝이 났어도 윤호에게는 상처 주지 않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어. 아이에게 그 누구에 대한 원망도 심어주지 않고, 이 아이가 엄마 아빠 사랑 모두 충족하며 부족하지 않게 자랐으면 좋겠어. 그거 하나면 돼 나는."

"노력할게. 윤호 보고 싶으면 아무 때라도 전화하고, 찾아와. 나도 우리가 다시 부부로 살 수 없는 거 알아. 나 같은 건 누구랑도 결혼하면 안 됐어. 당신 말대로 윤호한테 상처 주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노력할게. 오늘도, 괜찮으면 윤호랑 자고 가도 돼."

"괜찮겠어? 어머님 아시면..."

"앞으로도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근데 나 집 정리했어. 혼자서는 도저히 그 집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여기 오기 전에 부동산 들려서 정리하고 왔어."

"... 그랬구나. 하긴, 셋이 살던 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도 힘든 일이지. 잘했네. 그럼 숙소 잡아줄게. 나는 이 커피 다 마시고 나갈 테니까, 윤호 데리고 가서 내일 내려가기 전에 연락 줘. 내가 데리러 가든지 당신이 데려다주든지 그건 맞추면 되니까."

"알겠어. 그럼 오늘은 윤호 내가 데리고 갈게. 고마워."

"숙소는 예약하고 문자로 보내둘게. 윤호야, 윤호 오늘은 엄마랑 놀고, 엄마랑 자고 와. 내일도 엄마랑 실컷 놀고 와. 알겠지?"

"진짜야? 엄마랑 오늘 자는 거야?"

"응. 아빠랑은 내일 만나고. 윤호 오늘은 엄마랑 하고 싶은 거 다 해. 알겠지?

"알겠어 아빠. 내일 만나!"


전남편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카페를 나갔다. 내일 다온골에 가기 전까지 윤호와 온전히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복이었다. 나는 윤호와 함께 차를 타고 윤호가 가고 싶어 한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윤호와 나란히 공룡 머리띠를 하고 손을 꼭 잡은 채 놀이공원 이곳저곳을 누볐다. 함께 사진도 찍고, 퍼레이드도 보고, 윤호가 좋아하는 햄버거도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며 함께 먹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 소소한 행복이 얼마만인지. 나도 윤호도 그저 행복하기만 한 아쉬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놀았는지 차에 탄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윤호는 잠이 들었다. 나는 전남편이 문자로 보내준 숙소로 향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가방과 짐들을 한 손에 든 채 다른 한 팔에는 윤호를 안았다. 잠이 깬 것 같았지만 내 품을 파고드는 아이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윤호를 안고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눕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윤호는 활짝 웃어 보이며 두 팔을 벌렸다.


"엄마, 나 사실은 아까부터 일어났는데, 엄마 안고 싶어서 자는척했어."

"알고 있었어 엄마는. 윤호 일어난 거. 근데 엄마도 윤호 안고 싶어서 모른척했어."


우리는 그간 보고 싶었던 마음을 그렇게 꼭 끌어안았다.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시켰다. 전남편이 윤호 옷을 챙겨 들고 온 덕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힐 수 있었다. 드라이기로 윤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혼 후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윤호는 두 달여의 시간 동안 한 뼘 더 자라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 같았다. 뽀득뽀득 하얀 볼에 뽀뽀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준비해 간 선물을 윤호에게 건넸다. 예상대로 윤호는 방방 뛰며 기뻐했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공룡그림이야! 여기 안에는 뭐가 있는 거야?"

"윤호가 직접 열어봐."

"엄마, 로봇 공책! 우와, 이거 연필이랑 키링도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야. 이거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야. 엄마 최고!"

"윤호야,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랑 아빠도 이런 거 많이 사주시잖아."

"맞아. 근데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런 거 캐릭터 잘 몰라. 아빠는 할머니한테 사달라고 얘기하라는데, 할머니는 애기 거 같은 캐릭터 그림 있는 거만 사와."

"하하, 애기 거 같은 건 뭐야 윤호야? 그래도 사주시면 '감사합니다.' 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

"엄마, 당연하지. 나 이제 좀 있으면 학교가잖아. 애기 아니야. 그리고 선생님이 어른들한테는 인사 잘하는 거라고 해서 나 인사 진짜 잘해."

"맞아, 우리 윤호는 원래 예의 바르고 착한 어린이야. 엄마가 잘 알지."

"엄마, 이거 쿠키는 유치원에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도 돼?"

"당연하지. 너무 좋은 생각이다. 이 쿠키, 엄마 친구가 윤호 갖다주라고 직접 만들어 주셨어."

"와, 엄청 맛있겠다! 엄마가 대신 '감사합니다.'인사 꼭 전해줘야 돼!"

"알겠어. 꼭 전할게. 그리고 엄마가 할 말이 있는데... 윤호야, 엄마가... 떨어져 지내게 해서 미안해."

"엄마, 처음에는 엄마 보고 싶어서 엄청 엄청 울었는데. 우리 반에 친구 세명도 나랑 비슷해. 한 명은 아빠랑 살고, 두 명은 엄마랑만 산대. 근데 그 친구들도 이제 학교 들어가는 형님이라서 안 울기로 했대. 그러니까 나도 이제 안 울 거야."

"우와. 진짜 멋지다 우리 아들. 그럼 윤호야, 엄마가 여기 윤호 만나러 자주 올게. 자주 와서 윤호랑 이렇게 한 번씩 같이 자기도 하고, 놀이공원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너무 좋아 엄마! 자주 와야 돼. 아빠가 엄마 이사 갔다고 했어. 엄마 집 여기서 멀리 있다고. 그럼 엄마 맨날 오기는 힘드니까... 그래도 자주 와야 돼. 보고 싶으니까."

"당연하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얘기해. 그럼 아빠가 엄마한테 말씀해 주실 거야. 윤호가 엄마 보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당장 보러 와야지. 약속할게."

"약속!"


그 밤. 나는 윤호를 품에 꼭 안고 단잠을 잤다. 윤호에게서는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뿐만 아니라 그새 마음까지 한 뼘 더 자란 아이를 보니 눈물이 났지만. 이제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더 열심히 일해서 멋진 엄마가 되는 일만 남았다. 돌아가면, 나는 더 열심히 살아나갈 거다.


윤호의 손을 잡고 아침부터 여기저기 다니기 바빴다. 윤호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도 함께 보고, 윤호에게 어울리는 겨울옷과 신발을 사 신겼다. 윤호가 좋아하는 돈가스를 함께 먹고, 뜨거운 붕어빵을 호호 불어가며 거리를 걸어 다녔다.


"엄마, 나 1월에 유치원 졸업식 한대. 엄마 그때 올 거지?"

"당연하지. 윤호야, 지금 11월이잖아. 졸업식은 1월이지? 그럼 아직 많이 남았어. 엄마 그전에 윤호 보러 또 올 거야."

"진짜? 엄마 나 다음에는 엄마 집에도 가보고 싶어."

"그래? 근데 엄마 집 여기서 엄청 멀어서. 윤호가 힘들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나 이제 많이 커서 괜찮아."

"하하. 그럼 엄마가 그건 아빠랑 얘기해 볼게. 알겠지?"

"알겠어, 꼭이야 엄마!"


엄마집에 오고 싶다는 윤호를 보니 솔향집에 돌아가 새 집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호가 와서 편히 지내고 놀고 하려면 정말 내 집이 필요하다. 박선옥 씨의 밥을 매일 먹을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으니. 돌아가면 한동안은 또 바빠지겠구나 싶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도 금세 흘러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전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장소를 정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전남편이 오기로 했다. 윤호와 카페에 들어가 전남편을 기다렸다. 윤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지난번 헤어질 땐 너무나 울어서 마음이 아팠는데, 이제는 씩씩한 얼굴로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빠다!"

"윤호, 엄마랑 재밌게 잘 지냈어?"

"아빠, 어제 엄마랑 놀이공원에 가고, 오늘은 엄마랑 영화관도 가고, 돈가스도 먹고 엄마가 선물도 사줬어!"

"우와, 윤화 기분 진짜 좋겠다."

"엄청 최고야 아빠!"

"피곤하겠네, 종일 애랑 돌아다닌다고. 다시 내려가면 늦은 밤이겠어."

"괜찮아. 하나도 안 피곤해. 저기 혹시. 나중에 윤호 방학 때 내가 데리고 가서 돌봐도 될까?"

"방학 동안?"

"어. 방학 동안에라도 데리고 있으면서 챙겨주고 싶어서. 물론 어머님이 잘 챙겨주시겠지만... 엄마의 부재는 어디서든 느낄 수 있으니까... 방학 때라도 옆에 꼭 끼고 있고 싶어서."

"그래. 집에는 내가 알아서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 마. 방학 때 특별한 일 없으면 엄마랑 지내는 것도 좋지. 한참 엄마 보고 싶은 나이인데. 좋은 생각이네.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고마워. 윤호 아마 피곤할 거야. 오늘은 일찍 재워 줘."

"알겠어. 조심해서 내려가고... 윤호야,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엄마, 또 와! 전화해야 돼! 알겠지?"

"당연하지. 엄마가 전화할게. 윤호 집에 가서 아빠랑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들으면서 지내고 있어. 엄마 금방 또 올게. 알겠지?"

"응! 잘 가, 엄마!"


윤호는 야무지게 선물을 챙겨 들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끌고 다온골로 돌아오는 내내 밤은 깊어갔지만 곧 윤호의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벌써부터 들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른 집을 알아봐야 한다는 조급함도 동시에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도착했다. 태석이 마당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네, 카페 마감을 늦게 하고 들어와서요. 선영 씨도 늦으셨네요."

"네, 원래대로면 어제 오는 건데. 아이와 하루 자고 왔어요. 오늘도 종일 아이랑 있다가 저녁 무렵에 헤어졌어요."

"좋으셨겠어요. 집은 잘 해결됐어요?"

"네. 이제 진짜 끝이요. 새 주인 만났어요. 저는 이제 여기서 또 집을 구해야죠."

"솔향집 말고, 다른 집 구하시기로 한 거예요?"

"아이 방학 때는 제가 데리고 있으려고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제가 작은 집이라도 얻는 게 낫겠죠."

"그러네요. 아이가 오는 거라면. 여긴 아무래도 민박집이니까요."

"내일부터 알아보려고요. 괜히 벌써부터 신나요. 전남편이. 이혼 전하고는 좀 바뀐 것 같더라고요. 아이 만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시부모님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참... 이혼 전에 그렇게 좀 해주지. 좀 씁쓸했어요."

"원래 있을 때는 소중한 걸 잘 몰라요. 잃고 나서 알게 되죠. 그래도 아이와 자주 볼 수 있으니 다행인 거죠.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잖아요."

"맞아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이제 그만 슬퍼하고 진짜 씩씩하게 살아야죠. 일도 더 열심히 하고."

"하하.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저는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씩씩하지 못해요. 씩씩한 척하는 거죠. 어쩌면 선영 씨가 저보다 더 강한 사람인 것 같네요."

"도움이 많이 됐어요. 여기 와서.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였거든요. 근데 태석 씨가 많이 도와줬죠.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저는 한 게 없어요. 다 선영 씨가 스스로 한 거예요."

"여기 진짜. 마을 이름대로 좋은 일이 다 오는 곳이 맞는 것 같아요. 여기 올 때... 제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거든요. 근데 다온골에 온 뒤로 전에 없던 좋은 일들이 하나씩 생기고, 좋은 사람들도 옆에 생기고,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이 마을이 참 좋긴 하죠. 저도 그래서 못 떠나고 있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무슨 생각으로 카페를 차렸는지. 어쨌든 먹고살겠다고. 그게 벌써 2년이 넘은 것 같네요."

"그게 더 대단하죠. 제 상처는 태석 씨 상처에 비할 수가 없죠. 이런 말씀 조심스럽긴 한데... 먼저 떠난 가족분들도 이제는 태석 씨가 씩씩하게 살길 진심으로 바라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원망하지는 않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이제 그만 죄책감에서 벗어나길 바라실 거예요. 애초에 사고도 태석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 단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십 년 넘게 힘들어하셨으니. 이제 그만 힘드시길 바랄 거예요..."


태석은 깊은숨을 내쉬며 하늘만 바라봤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감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우리는 더 이상의 말은 이어가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그리고 스스로의 상처에서 벗어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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