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따뜻한 사람
아직 새벽빛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세수를 하고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확인하고, 원고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하나의 오탈자도 허용될 수 없기에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걱정했던 일들이 하나둘씩 해결되어 가고 있는 탓인지, 덕분에 일을 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아침 식사를 하며 박선옥 씨에게 먼저 말을 했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집을 얻어 단장을 해 놔야 윤호가 놀러 올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저... 집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아이 아빠가 방학 때는 아이가 저랑 지내도 된다고 허락했거든요."
"아유, 세상에나! 너무 잘됐다!"
"네, 그렇게 냉랭하게 굴더니, 마음이 많이 바뀌었나 봐요."
"원래 그래. 옆에 있을 때는 몰라. 혼자 있어봐야 소중한 걸 안다니까. 어쨌든 잘된 일이야. 방학이면 한 달 이상일 텐데 그럼 집을 구하는 게 편하지. 부동산 하는 사람들 알아. 우리 남편 친구들 중에도 부동산 하는 사람들 있고. 내가 좀 알아봐 줄까?"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저 혼자 살림하면서, 아이 오면 같이 지낼 수 있는 깨끗한 집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좋으면서도 비싸지 않은 곳으로 알아봐 달라고 할게. 아는 사람 뒀다가 뭐 해. 우리 남편 죽은 지 오래됐어도 친했던 친구들 많아서 그런 집 알아보는데 오래 안 걸릴 거야. 내가 전화 넣어둘 테니까 염려 말고 편히 일이나 하고 있어."
"매번 너무 감사해요."
"이게 뭐 일이라고. 난 그냥 애기엄마가 잘 살기만 하면 돼. 더 바랄 것도 없어."
"잘 사는 모습으로 보답할게요. 저 여기 와서 정말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일도 더 많이 들어오고, 아이랑도 자주 볼 수 있게 됐어요."
"우리 집이 터가 좋은가 봐."
박선옥 씨의 말에 우리는 소리 내어 웃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특별할 것 없는 소탈한 일상의 대화였지만 내가 늘 그리워했던 풍경 속에 섞여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일을 이어 나갔다. 집중력도 전보다 더 좋아지고, 피로감도 훨씬 덜했다. 몸과 마음이 같이 회복되어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고 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탓에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편안하게 낮잠을 자보는 게 얼마만인지. 두꺼운 이불을 푹 덮고 그동안의 피로를 다 풀어내기라도 하는 듯, 오랜 낮잠을 잤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뜨니 시간은 오후 네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박선옥 씨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먹을거리를 주고받는 정겨운 풍경에, 내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머물기로 했다. 날씨가 제법 추워진 탓도 있지만, 서울에서 자고 오느라 하루치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낮잠도 네 시간이나 넘게 자는 바람에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게 느껴졌다. 저녁 식사 전까지 다시 집중해서 일을 해 나갔다. 문학 소설이나 시집 원고는 그래도 교정 교열이 어렵지 않았는데, 이번에 맡은 건 전공서적이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생소한 분야의 전공서적이다 보니 더 많은 집중이 필요했다. 자주 등장하는 전공 용어도 일일이 확인을 해가며 살펴봤다. 그 바람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애기엄마, 어여 나와 저녁 먹어!"
박선옥 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일에 몰두해 있느라 저녁 시간이 다 된 줄도 몰랐다. 오늘 저녁 상에는 굴전과 봄동무침이 올라왔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이게 딱 이맘때 먹어야 더 맛있어. 사람은 원래 제철에 나는 걸 먹어야 건강한 거야. 나는 시골사람이라 인스턴트 같은 거는 영 안 좋아해. 이런 게 좋더라고."
"저도 인스턴트 별로 안 좋아해요. 이런 음식들이 훨씬 좋아요."
아침에 마주한 얼굴들과 다시 저녁 상에 둘러앉아 별 다를 것 없던 오늘을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에 얘기한 거, 전화해봤더니 마침 근처에 괜찮은 집 두세 군데 나온 게 있다더라고. 여기서 멀지는 않고, 차로 10분 정도? 애기엄마 차 있으니까, 10분 정도 거리 괜찮지? 그 정도면 오히려 시장이랑도 더 가까워서 편할 거야."
"네, 10분이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요. 제가 자주 오갈 수 있어서 괜찮은 것 같아요. 집 상태는 괜찮대요?"
"하나는 십 년도 더 넘은 집인데 이번에 내부 리모델링을 싹 했다고 하더라고 주인이. 그래서 깨끗하대. 나머지 둘은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서 상태가 괜찮대. 가서 직접 보고 마음에 드는 집 선택하면 되지. 월세 전세 다 된다고 하더라고."
"잘됐네요. 내일 보러 가도 괜찮대요?"
"어, 내가 전화번호 알려줄게. 부동산이랑 시간 맞춰서 가 봐. 내가 일부러 내 조카라고 해놨어. 아마 더 신경 써서 잘해줄 거야."
"집 얻어서 나가시는 거예요?"
박선옥 씨의 아들이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내가 대답을 하려던 찰나 박선옥 씨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럼 이놈아, 여기가 민박 집인데, 평생 살 줄 알았냐?"
"아니 여기 카페 사장님도 계속 살고 계시잖아. 나는 그래서 사시는 건 줄 알았지. 월세 뭐 이런 것처럼."
"아이고, 여기는 민박집이여. 남자랑 여자가 같냐. 내 살림하던 사람은 갑갑해. 작더라도 내 집에서 내 살림하고 살아야지."
가만히 듣고 있던 태석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주머니, 저는 살림을 안 살아봐서. 아마 앞으로도 기약 없이 있을 것 같아요."
"아이구, 카페 사장님은 됐어. 그냥 내가 우리 식구다 하고 살고 있어 지금도."
"저는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밥도 맛있고, 제 방도 너무 편해서 어디 못 가겠어요."
"그려, 어디든 내 맘 편한 데가 최고지. 공짜로 있는 것도 아니고. 꼬박꼬박 달마다 돈 내면서 지내고 있는데. 내가 고맙지."
"그럼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릴게요."
"새삼스럽긴. 하여튼 싱겁다니까."
식사 후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일만 했더니 바깥바람이 쐬고 싶어졌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오니 마침 태석도 마당에 있었다.
"저, 종일 방에만 있었어서 산책 좀 하고 오려고요."
"이 시간에요? 아무리 촌동네여도 위험할 텐데요. 저도 오늘은 카페 일찍 닫고 와서 할 게 없어요. 같이 가도 될까요?"
"저야 그럼 감사하죠."
우리는 마을 길을 따라 걸었다. 밤하늘에 뜬 달의 빛과 가로등 불빛이 길을 훤히 비춰주었다.
"오늘은 계속 집에서 일만 하신 거예요?"
"네, 하루 일을 못했더니 쌓여서요. 거기다 이번에 맡은 건 전공서적이에요. 분야도 생소한. 그래서 더 오래 걸리더라고요. 전문 용어도 이게 맞는 건지 일일이 찾아보면서 해야 하고, 영어 단어도 오탈자 없나 확인하고. 그러느라 속도가 더디게 나가더라고요. 출판사 다닐 때도 항상 생소한 분야 윤문 작업은 오래 걸렸어요."
"혹시 어떤 분야의 책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정치외교학과 교재로 쓰일 책인가 봐요. 제 전공이 아니라 그런지 더 신경이 쓰이고, 이미 확인한 거 다시 확인하고 몇 번을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선영 씨가 한번 싹 작업 하시고, 내일 카페로 노트북 들고 오세요. 오래되긴 했어도, 출판사 다닐 때 제가 일하던 곳에서도 문제집이나 전공 서적을 많이 출판해서 거의 매일같이 붙들고 있었거든요. 물론 교정 교열을 전문으로 하는 직원들이 있긴 했지만, 제가 최종적으로 다시 확인을 하면 꼭 하나둘씩 고칠게 나와서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갑작스럽게 직원이 안 나오거나 그만두면 또 제가 다 떠안고 할 때도 많았어서."
"카페 일도 바쁘실 텐데, 제가 괜히 민폐 끼치는 건 아닐까요?"
"시골 카페가 바빠봤자죠. 더군다나 평일엔 널널해요. 선영 씨가 테이블 정리만 도와주시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요."
"제가 진짜... 여기 와서 도움 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네요. 감사해요.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이야기를 하는 사이 마을 한 바퀴를 다 돌았다. 태석에게는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 밤, 나는 남은 분량의 원고를 붙잡고 씨름을 하며 1차적으로 작업을 끝마쳤다. 부디 태석의 눈에 띄는 실수가 없길 바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그 어디쯤에서 나는 다시 그 얼굴과 마주했다. 늘 희미한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묘연의 인물. 나는 전처럼 울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판에 핀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는 여전히 희미한 얼굴의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웃고 있었다. 손을 잡고 거닐며 곱게 피어난 꽃을 보며 하염없이 그 길을 걷고, 또 걸어 나갔다.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늘 희미한 모습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그렇게 기울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태석의 출근길에 함께 동행했다. 그를 도와 카페 오픈 준비를 하고, 오늘의 커피를 준비하며, 자신이 로스팅한 원두에 대해 설명하는 태석에 말에 귀 기울였다. 늘 마실줄만 알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커피의 세계도 영 쉽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드물었다. 나는 늘 앉던 창가 자리가 아닌 태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작업한 파일을 열어 태석에게 보였다. 태석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안경까지 쓰고 첫 페이지부터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카페에서 늘상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르게 보였다. 눈빛도 분명 달랐다. 작업한 원고를 살펴보는 태석의 눈빛은 날카롭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20여분의 시간 동안 태석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꼼꼼히 확인해 나갔다. 그러다 뭔가 확인했다는 듯 눈이 번쩍였다.
"여기, 하나 나왔네요. 이게, 컴퓨터가 다 잡아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거든요. 전문 용어도 영어 단어는 그런 경우가 더 많아요, 스펠링 하나만 틀려도 뜻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니까요. 이것도 잘 보세요. 'I'가 아니고 소문자 'ㅣ'로 쓰는 게 맞아요. 이걸 작성한 저자도, 교정 교열 작업을 한 번 걸친 선영 씨도 이 부분은 놓친 거예요."
"이건 제가 생각지도 못한 거네요. 저는 다른 부분에서 실수가 나올 줄 알았거든요. 진짜 편집장을 하셨던 게 맞나 보네요. 보는 눈이 예리하신 게..."
"오래 지났어도 한 번 생긴 직업병은 안 없어지나 봐요. 저도 하도 오래전이라 제가 잘 확인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읽어 나가면서 예전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 어떻게 작업을 했었는지, 어느 부분에서 실수가 많이 발생했었는지."
"덕분에 하나 배웠어요. 다음번엔 이 부분에 더 집중해서 확인해야겠어요."
"분량이 워낙 많아서 오늘 안에는 확인을 다 하기는 어려워요. 아마 내일까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이번 주까지만 해서 넘기면 돼서요."
"잘 됐네요."
태석은 커피를 내리는 시간 빼고는 나 대신 노트북에 매달려 있었다. 손님 응대와 테이블 정리, 계산은 내가 맡았다. 대학생 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력을 살려 태석에게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했다. 그간 받은 도움에 비하면 작지만 이렇게라도 도와야 한다.
박선옥 씨에게는 카페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가겠다고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 카페 마감 후에 태석이 만든 빵과 커피를 먹으며 함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전에 태석이 지적한 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실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꼼꼼히 보셨네요. 오랜만에 편집장 입장으로 일 했더니 그때 어떻게 이 일을 맨날 했나 싶네요. 눈이 빠질 것 같네요. 하루 종일 글만 붙잡고 있으니. 선영 씨는 괜찮아요?
태석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익숙해요. 물론 하루 종일 붙들고 있으면 피곤하긴 한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으로선 이거뿐이라서요."
"그래서 경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육아하면서 경력이 단절됐어도, 선영 씨가 출판사 다닐 때 일을 꼼꼼히 잘했으니 그걸 기억하고 일을 맡기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엉망으로 했으면 누가 맡기겠어요."
"편집장님한테 받는 칭찬이라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진짜예요. 제가 편집장이면 당장 스카우트 할 것 같은데요. 같이 일하자고."
"다시 출판계로 가실 생각은 아예 없으신 거예요?"
"저는 카페 사장이 더 좋아요. 커피를 배우면서 마음이 치유된 것도 있고 심적 여유도 생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전에 얘기했듯이 이 동네가 좋아져서, 박선옥 씨 밥이 맛있어서 딴 데는 못 가겠어요."
"그러네요. 하긴, 저도 프리랜서로 일 하는 거지 정직원은 아니네요. 얽매이기 싫고 여기서 자유롭게 일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거겠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마음도 여유롭게 사는 거. 그걸 선영 씨가 하고 있는 거예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늘 제가 긍정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 같아요. 처음 왔을 때도 지금도."
"저는 오히려 선영 씨 보면서 제가 투영되어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저도 같이 회복해 나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냉철해 보이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근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 반대라고 느껴요. 어쩌면 태석 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해요."
"제 예전 별명이 냉혈한이라니까요. 아무한테나 따뜻한 사람 아니에요."
정적이 흘렀다. 어떤 말을 이어 나가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한테나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애꿎은 커피잔 손잡이만 만지작 거렸다. 나도 태석도 창 밖에 달빛이 내려앉은 길가에 시선을 두고 각자의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