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20. 오랜 겨울의 끝, 드디어 봄

by 구혜온

달빛은 어색한 침묵과 고요를 모두 끌어안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 떠오르는 말 조각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늘 먼저 손을 내미는 건 태석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화의 흐름을 이어 가는 게 맞다고 느꼈다. 늘 받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러고 싶었다.


"따뜻한 사람... 맞아요. 제가 받고 느낀 바로는 그래요."

"선영 씨니까요. 제 스스로도 외면하고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는 순간에 숨긴 마음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하고, 일부러 더 그 마음을 모른 채 했어요. 근데 엊그제 선영 씨가 그랬죠. 먼저 간 가족들이 제가 계속 이렇게 살기 원하지 않을 거라고. 밤새 생각했어요. 어쩌면 선영 씨 말대로 제가 지금까지 겨우겨우 살아냈다면, 앞으로는 씩씩하게 잘 살아가길, 살아나길 바라지 않을까 하고요."

"그건 진심이에요. 제가 가족분들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네, 그래서 살아나가 보려고요. 저도 선영 씨처럼 몸도 마음도 살아나서 스스로 외면했던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마주하면서 살아보게요.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요."

"늦은 건 없어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르다는 말이요."

"네. 덕분에 저도 살아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리고 선영 씨한테 기울던 마음도 이제는 외면하지 않으려고요."

"..."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선영 씨한테 자꾸 마음이 기우는 게 스스로 죄책감이 들어서 일부러 외면했어요. 근데 자꾸 신경 쓰이고, 어쩌면 선영 씨가 나한테 살아나갈 마음을 갖게 한 것처럼 나도 선영 씨한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어요. 내내 춥기만 했던 십 년 넘는 인생의 겨울이 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들..."


태석은 덤덤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하고, 그 감정들이 나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나 역시 그토록 소망하던 겨울 건너편의 봄을 이제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태석 씨의 겨울이 길었던 것처럼 제 인생에서의 겨울도 꽤나 길었어요. 어쩌면 평생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살았다고 해야 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몰라요. 하나하나 읊자면 서사가 길지만, 인생에서 단 몇 년을 제외하고는 늘 추웠어요. 그 추위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마주할 때마다 새롭고 낯선 시림이 마음에 상처를 내는 삶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가 저도 얼마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서라면... 좋은 사람들 곁에 서라면, 그 좋은 사람들 사이에 태석 씨도 함께라면 저도 봄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같은 생각을 했네요 우리. 각자가 다른 곳에서 오래도록 겨울에 갇혀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아서,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산 얼음 인간들. 함께 한다면... 이 오랜 겨울을 깨고 봄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요..."

"아마도..."

"혼자만의 생각이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럼 정말 우스운 꼴이 되잖아요."

"저는... 혼자만의 생각일까 봐 절대 말 안 해야지 생각했어요. 아마 태석 씨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영영 얘기 안 했을지도 몰라요."

"다행이네요. 한참 부족하고 서툴고, 촌스러운 사람이라서 답답할 때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선영 씨가 함께 해 준다면 새 봄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봄. 생각만 해도 따뜻해요. 저야말로 실수투성이에 부족한 것 많은 사람이에요. 같이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더 이상의 긴 이야기도,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봄'은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계절 그 이상의 것이었다. 기억이 생성되는 순간부터 늘 겨울만을 거닐어 온 나.


봄이라고는 이혼한 전남편과 연애하던 그 3년과 윤호가 태어나기 전 잠깐의 신혼을 즐기던 1년 남짓의 시간까지 불과 4년의 시간만이 봄이었을 뿐, 나는 늘 칼바람이 부는 추위 속에 놓인 채 살아왔다. 그래서 39년의 내 삶을 돌아보면 설움만 가득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칼바람에 몸을 맡기는 스스로가 늘 안타까웠다. 어쩌면 앞으로도 이따금씩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 늘 봄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사람과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면 그다음에 어떤 계절이 어떤 형태로 내 앞에 선다고 해도 용기 내서 건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행복의 단꿈에 빠져있던 때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태석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겨울 속에 가둬두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받지 않으면서 오래전 기억만을 품은 채 피어나는 감정들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고립한 채 살아왔다. 그런 사람이 나를 보고 봄을 품었다고 한다. 함께 봄을 건너자고 말을 한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 우리에게는 오래 걸렸고,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달력의 계절은 한창 겨울 속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삶의 계절 속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온골에 오며 나는 그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죽지 못해 사는 나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인 사람들이 살려냈다. 좋은 일이 다 오는 곳에서 모양은 다르지만 가족을 자처하는 사람을 만났고,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 걸어갈 사람도 만났다.


뜨거운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우리는 오랜 겨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완연한 봄꽃이 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발맞춰 봄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나갈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 인생에 길고 길었던 겨울이 결국 이 봄을 맞이하기 위해 그랬던 거라고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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