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5화. 장터와 달빛 사이에서

by 구혜온

아직 해가 다 오르기 전인데도 골목은 분주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발소리, 수레바퀴의 덜컹거림, 아침 공기 속에 섞인 장터 특유의 냄새까지—
마을은 이미 장터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박선옥 씨가 옆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은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요. 외지인도 오고, 구경꾼도 많이 올 거예요.”
말끝에 묻어나는 설렘이 공기처럼 번졌다.

마을 어귀를 지나자 풍경이 달라졌다. 색색의 천막 아래, 계절의 향기와 색을 품은 물건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다온골에서 수확한 농산물, 직접 농사진 깨로 갓 짜낸 참기름과 들기름, 손수 만든 공예품, 그리고 붉은 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한쪽에선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수한 장터국밥과 파전, 잔치국수 등을 파는 먹거리 천막 아래에는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반주를 곁들이는 동네 어르신들도 계셨다.



다온골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격을 흥정하는 외지인들의 소리,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겹겹이 얽혀 장터의 숨결이 되었다.
도시에도 시장은 있지만, 그곳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곳에서는 삶 자체가 진열되고 있었다. 낯선 활기가 몸을 밀어내는 동시에 끌어당겼다.

“처음 와보시죠?”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한태석이 서 있었다. 작업복 대신 깨끗한 셔츠 차림. 햇빛을 받은 얼굴이 어제와는 다른 낯섦을 풍겼다.

“…네. 생각보다 북적이네요.”
“다온골 장터는 단순한 장터가 아니에요. 사람들의 기억이 쌓이고, 이야기가 팔리고, 잊혔던 것도 되살아나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 천막에서 외지인 하나가 큰소리로 흥정을 시작했다.

“이게 다 얼마라고요? 도시에선 반값이면 사요!”

투박한 억양이 장터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했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태석이 앞으로 걸어 나섰다.
“여긴 도시가 아닙니다. 여긴… 계절이 값을 매기죠.”

짧지만 단호한 말. 순간 웅성임이 일었고, 외지인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동안, 그가 이곳에서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마을의 숨결을 지켜내는 목소리, 오래전부터 이 땅에 스며든 존재.

한쪽에서 작은 손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이모, 이거 같이 먹어요.”

작은 손에는 반으로 잘라낸 감 한쪽이 쥐어져 있었다. 아들 또래의 아이였다.
멈칫하던 손끝으로 감을 건네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가을을 가득 담은 은은한 단맛의 과즙이 입안에 번지자 오래전 잃어버린 감각이 되살아났다. 심장이 알 수 없는 떨림으로 흔들렸다. 멀리서 태석의 시선이 겹쳐 들어왔다.
장터가 끝난 저녁, 마을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북적임은 흩어지고, 골목마다 등불이 하나둘 켜졌다.

문밖으로 나오자 달빛이 온마을을 덮고 있었다. 회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태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노트를 펼쳐 들고 있었다.

“아직도 정리 중이세요?”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그는 고개를 들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시끄럽던 하루가 끝나니, 글자들이 더 잘 보이네요.”

노트 안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들이 이어져 있었다. 계절의 이름, 누군가의 짧은 일기, 오래 전의 기록들….
손끝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묘한 떨림이 전해졌다.

“도시... 다시 돌아가실 건가요?”
나도 모르게 불쑥 나온 물음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도시는 내겐 늘 잠깐 머무는 곳이었어요. 여긴... 끝내 돌아와야 할 자리였고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무게가 가슴 깊숙이 내려앉았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위안이 피어올랐다.

달빛이 유난히 밝고, 고요한 밤. 말은 적었지만, 침묵은 공허하지 않았다. 감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를 마음속에 새겼다. 오늘 밤의 대화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아마 계절이 바뀐다고 해도, 이 밤의 달빛과 공기, 그 목소리만은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keyword
이전 04화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