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4화. 첫 품앗이, 감빛으로 물든 아침

by 구혜온

눈물로 얼룩진 베개의 서늘한 촉감이, 꿈의 여운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밤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그 흔적은 아직 아침 속으로 번져 들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감잎 위에 맺힌 이슬이 후드득 떨어져 흙 위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 작디작은 소리까지 귓가에 닿는 게 낯설었다.
어젯밤 적어둔 메모가 떠올랐다.

_'내일의 나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_
그 다짐이 나를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는 이미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화를 신고 바구니를 든 채, 옹기종기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

어제저녁, 민박집 식탁에서 마주했던 그 남자도 감을 딸 채비를 하고 나와있었다. 밥을 먹으며 어색한 몇 마디만 나눴을 뿐, 아직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박선옥 씨의 가족인지, 아니면 나처럼 솔향집에 머무는 외지인인지... 어제의 어색함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감나무 품앗이예요.”

솔향집주인 박선옥 씨가 다가오며 말했다. 된장국을 내주던 어제의 담백한 얼굴 그대로였다.

“혼자라면 며칠이 걸려도 끝이 안 나지만, 여럿이 하면 금방이에요.”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다온골 사람들인지 가족처럼 가까워 보였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혼자만 다른 장면에 끼어든 사람처럼 느껴졌다.


붉게 익은 감나무 밭은 불길처럼 빛났다. 사람들은 능숙하게 사다리를 오르고, 아이들은 떨어진 감을 주워 담았다.

나는 그저 바구니를 든 채 서성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이면 바닥부터 하세요. 올라가는 건 위험하니까.”

어제저녁 함께 밥을 먹었던, 그 낯선 남자였다.
팔뚝에 감긴 붉은 손수건, 쉽게 지나치지 않는 눈빛. 짧은 말이었지만, 누군가의 챙김을 받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별 뜻 없는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바닥에 떨어진 감을 하나 둘 주워 담고 있을 때, 아이 하나가 바구니를 힐끗 보더니 소리쳤다.

“우리 집 감은 이거보다 훨씬 커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얼굴만 붉게 달아올랐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멀리 달려가면서도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나 역시 사람들 틈에서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낯선 자리의 어색함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자가 짧은 질문을 던졌다.


“서울 사람은 이런 풍경이 낯설죠?”

그 말에 나는 얼음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서울에서 왔다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 만에 벌써 소문이 퍼진 걸까. 아니면, 겉모습만 보고 짐작한 걸까. 대답 대신 바구니를 더 꽉 움켜쥐었다.

낯선 풍경보다 더 낯선 건, 사람들이 나를 너무 쉽게 알아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후, 박선옥 씨가 소리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내일 이어갑시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나도 무거워진 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솔향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내일도 나오시죠?”

돌아보니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햇빛에 반쯤 가려진 얼굴, 그늘에 감춘 미소로 뒤따라오며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감빛으로 물든 첫 품앗이의 아침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 따뜻함 속에 섞여든 작은 파문이 오래도록 가슴을 건드렸다.

그 작은 파문은 밤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았다. 햇빛에 반쯤 가려진 얼굴과, 그늘 속에 감춘 미소가 떠올랐다.
낯선 따뜻함은 불안처럼 가슴에 남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마을은 어제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마을회관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장화 끄는 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바구니를 들고 감나무 밭에 섰다.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은 어제와 달라져 있었다. 그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사다리를 오르던 아이 하나가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 내 아들 또래로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조심해!”

비명이 터져 나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나보다 더 아이 가까이에 있던 그 남자가 몸을 날려 아이를 붙잡았다. 사다리가 크게 흔들렸고, 내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울음은 곧 진정됐지만 나는 한동안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가 내 바구니에 감 하나를 얹으며 낮게 말했다.


“겁이 난 건 아이가 아니라… 당신인 것 같네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말 대신 애꿎은 바구니 손잡이만 꼬집듯 더 꽉 움켜쥐었다. 감 따는 일이 끝나고 사람들이 각자 집으로 흩어진 뒤, 밭가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낡은 노트 한 권을 꺼내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표지는 닳아 있었지만, 안쪽에는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_'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_


순간, 가슴이 저릿하다 못해 아파왔다. 계절을 건너온다는 그 문장이 마치 내 지난 시간을 정면으로 겨누는 듯했다.


이혼의 상처와 슬픔이 뒤엉켜 무너져버린 계절,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계절. 문장은 마치 내 이야기를 먼저 알고 쓰인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내가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저는 한태석입니다."


갑작스러운 소개에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오랜만에 내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 최선영이에요."


낯선 마을에서 처음 내 이름을 건네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를 재차 내밀었다.


"떠나기 전에 남긴 건데... 이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네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뜻을 되묻는 대신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내일은 장터 날입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신 주민 분들은 미리 준비하세요."


나는 노트를 가슴에 꼭 안았다. 단정한 글씨와 방금 들은 이름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감은 익어가고, 계절의 깊이도 더욱 깊어지는 가을의 어느 날, 내 인생의 계절도 전환점 앞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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