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낯선 골목, 첫 기척
차창 밖 풍경이 달라졌다.
아스팔트로 빽빽하던 길은 점점 좁아지고, 가로등 사이 간격은 멀어졌다. 도시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어둠이 창문 가까이 바짝 따라붙었다.
점잖게 흘러나오던 라디오의 음악 소리는 잡음에 짓눌리며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그 소리는 마치, 길게 뻗은 손을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 갈피를 잃은 내 모습과도 같았다.
문득, 정처 없이 낯선 곳을 향하고 있는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의 영혼이 송두리째 어둠 속에 꿀꺽 삼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긴긴 어둠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 장막은 물러나고, 아침 햇살이 산 능선을 넘어 흘러내렸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어둠이 완전히 걷힐 때까지 운전대만 붙잡고 있던 탓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비게이션은 이제 7분 뒤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안개가 벼 이삭 위에 앉아 은빛으로 번져가자,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 멀리, 그림 같은 마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회색 빌딩 숲에 갇혀 있던 내가, 오늘은 누군가가 준비해 둔 그림 속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굽어진 도로 끝, 작은 간판이 시야에 걸렸다.
_다온골, 어서 오십시오._
페인트가 거의 다 벗겨져 글씨는 희미했지만, 오히려 그 낡음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다온골.
좋은 일이 다 오는 마을. 도망치듯 달려온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좋은 일이 다 올 거라는 믿음뿐이었다.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 없어도, 이렇게라도 의미를 부여해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스스로를 속이듯, 다짐하듯.
마을 초입으로 들어서자 풍경은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낡은 돌담 위로 감나무들이 주홍빛 열매를 매달고 있었고, 산등성이에는 이른 가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골목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작은 개 한 마리가 그 뒤를 쫓으며 연신 짖어댔고, 돌담 사이 장독대에서는 ‘쿵’ 하고 뚜껑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된장 익어가는 냄새, 바람결에 감나무 잎이 서로 스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도시에서는 늘 묻혀 사라지던 소리와 냄새들이 여기서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
풀 냄새, 흙 냄새, 장독대에서 풍기는 된장의 묵직한 향이 섞여 들어와 가슴속 응어리를 조금은 덜어내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 밑바닥이 서늘하게 비어 오는 기분도 스쳤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오른 건 일곱 살 난 아들의 얼굴이었다.
전남편과 함께 있는 그 아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한 내 아들.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에 내 몫은 없었다. 나는 다시 창문을 올리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민박집 ‘솔향집’ 앞에 차를 댔다. 소나무 몇 그루가 마당을 지키듯 서 있었고, 낡은 지붕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여기서 한동안 머무르며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정말 견뎌낼 수 있을까.
트렁크를 열어 가방을 꺼내려는 순간, 현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열렸다. 낯선 남자가 낡은 책 몇 권을 가슴에 안고 나왔다. 남자의 어깨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온 햇살이 책 표지를 스치자 반사된 빛이 반짝였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서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의 힐끗거림에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려 가방을 챙겨 들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내 앞의 문, 그리고 버텨야 할 시간뿐이었다.
나는 짐가방을 들고 세 칸짜리 계단을 올라 솔향집 현관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민박하시려고?”
카운터 의자에 걸터앉아 TV를 보고 있던 중년의 여성이 어기적 일어나며 말했다. 아마도 이 솔향집의 주인인 듯했다.
“네, 좀 길게 묵을 것 같아요. 몇 주, 어쩌면 몇 개월…”
나는 말 끝을 흐렸다. 얼마나 묵을지는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아유~ 우리야 그럼 좋지! 어서 들어와요.”
솔향집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파리만 날리던 식당에 간만에 손님이 방문한 것처럼 들떠 보였다.
내가 솔향집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 민박집 간판을 단 곳은 이곳뿐이었으니까.
주인의 환대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현관을 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현관문은 또다시 삐걱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닫혔다. 현관 안쪽은 의외로 어두웠다. 햇살이 잘 드는 마당과 달리, 집 안은 낮인데도 음영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무 바닥은 오래된 듯 삐걱였고, 구석 어딘가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똑 울렸다.
낯선 마을, 낯선 민박집, 낯선 기척. 나는 과연 새롭게 시작될 계절로 들어온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그림자 속으로 발을 들인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얼마가 되었든 일단은 이곳에서 버티며 견뎌야 한다는 사실뿐.
민박집주인이 방 열쇠를 가지러 간 사이 거실 한편에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멀뚱히 서 있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 속에 내 아들의 목소리는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와 뼈마디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버티고, 또 무엇을 잃어야만 하는 걸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만 더더욱이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다. 상처투성이가 된 영혼과 마음을 이제부터라도 지켜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