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프롤로그 | 1화. 도시의 마지막 밤

by 구혜온

-프롤로그

가을은 언제나 끝에서 시작되었다.

단풍이 가장 붉게 타오르는 계절,
나는 결혼도, 믿음도, 내가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놓아버렸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견딜 수 없는 공허함에

도망치듯 도시를 떠났다.

내가 여태껏 살아온 이 도시는

더 이상 나를 품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불빛, 수많은

발걸음 속에서 나는 유령처럼 떠돌았다.

살아남기 위해, 떠나야만 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찍힌 목적지,
다온골.

좋은 일이 다 오는 마을이라는 뜻.

허망한 이름일 뿐이라 해도,
이제는 그 이름이라도 믿어야만 했다.


*


-1화. 도시의 마지막 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나는 밤늦게까지 불 꺼진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문틈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TV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식탁 위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나만 빼고 이어지는 다른 삶 같았다.

우리 집은 이미 빈 껍데기였다. 책장은 비어 있었고, 벽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도 내려졌다. 한때는 사랑이 있었고, 함께 늙어갈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약서 한 장, 도장 하나로 모든 게 지워졌다.

거울 속의 나는 낯설었다. 마흔을 앞둔 여자, 얼굴은 지쳐 있었고 눈동자는 퀭했다. 도시에선 수없이 많은 불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내 눈엔 그 불빛조차 차갑게만 느껴졌다.

숨을 쉬는 공기조차 무겁게 조여 오는 밤. 나는 천천히 차 키를 움켜쥐었다. 낮에 미리 짐을 실어둔 트렁크에는 서류봉투와 옷가방 하나, 그리고 아직 버리지 못한 작은 앨범이 들어 있었다. 더는 미련도, 남을 자리도 없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계기판 불빛이 켜졌다. 마치 살아 있음을 확인하듯, 엔진이 낮게 떨렸다.나는 잠시 핸들 위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이제… 어디로든 가야 한다.”
목소리는 낮게 흩어졌지만, 그 말은 곧 결심이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사랑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곧바로 주파수를 꺼버렸다. 사랑 같은 건 이제 내게 없으니까.

도시의 네온사인이 차창 밖으로 흘러갔다. 붉은 신호등, 화려한 간판, 깜빡이는 전광판….

모든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속에 있는 나는 꺼져가는 빛에 가까웠다.

차는 점점 도심을 벗어났다. 아파트 숲은 멀어지고, 대신 검은 들판이 창밖에 펼쳐졌다. 가로등이 드문 길, 밤하늘이 활짝 열리자 별빛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려앉았다. 창문을 내리자 밤공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눈가를 스치며, 오래 붙들고 있던 뜨거움을 식혔다.

그게 눈물이었는지, 단순히 바람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무너진 마음의 틈새로 계절이 서서히 스며드는 것만은 분명했다.


백미러 속 도시의 불빛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제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뒤에는 상실과 무너짐이 있고, 앞에는 아직 알 수 없는 길이 있다.


나는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었다.
“살아남기 위해 떠난다.”


차는, 계절이 바뀌어 가는 어둠 속을 향해 묵묵히 달려가고 있었다.


멀리 아주 작은 불빛 몇 점이 밤의 어둠을 조용히 흔들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나를 향해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신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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