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기적처럼 기억난 번호

by 자신을사랑하기

2화: 기적처럼 기억난 번호, 운명의 시작


나는 숫자에 무던한 사람이다. 누군가의 전화번호 하나를 외우는 것도 내게는 꽤 고역이라, 중요한 번호는 늘 낡은 수첩이나 메모지 구석에 적어두어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날도 그랬다. 당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막내딸을 한번 만나보라며 툭 던지듯 불러준 번호. 나는 건성으로 주머니 속 영수증 뒷면에 그 열한 자리 숫자를 적어 넣었다.


하지만 그 영수증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옷 주머니를 뒤집고 책상 위 서류 더미를 훑어도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인연이 아니려나 보다' 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평소라면 금방 휘발되었을 그 숫자들이 거짓말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갑자기 밝은 별자리 하나가 길을 내어준 것처럼, 잊으려 할수록 숫자의 배열은 더 또렷해졌다.


홀린 듯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다시 떠올려 봐도 당신은 아직 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어린 모습이었고,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나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옷 같았다.


나는 미안함과 거절의 마음을 담아, 최대한 정중하게 문자를 써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번호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인 것 같아서요. 저 말고 더 좋은 사람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니 이제 인연의 실타래는 여기서 끊기겠거니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남았지만, 그것이 서로를 위해 가장 예의 바른 마침표라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화면에 뜬 당신의 문장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차분했다.


[아버지가 소개해주신 분이고, 워낙 좋게 말씀하셔서요. 한 번쯤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밀어내려던 내 손을 가볍게 맞잡아오는 듯한 대답이었다. 어른의 말씀이니 예의상 한 번은 얼굴을 보는 게 도리라는 당신의 논리는 단호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거절의 문자를 발판 삼아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낸 그 담백한 문장 한 줄이 나의 머뭇거림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결국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나이 차이라는 벽을 세우고 뒷걸음질 치던 나와, 그 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문을 두드린 당신. 잊어버린 줄 알았던 번호를 기적처럼 기억해낸 나의 머리와, 그 번호로 날아온 거절을 기회로 바꾼 당신의 마음이 만난 날.


우리의 시작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보다는 '운명 같은 우연'에 더 가까운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훗날 그 궤도가 뒤틀려 당신이 나를 몰라보는 행성으로 떠나가 버릴 줄은, 그땐 정말 꿈에도 모른 채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갈 셔츠를 고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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