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리미리 글이 안 써질 때를 ‘대비’한다. MBTI(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 Myers-Briggs Type Indicator)에서 계획형 이미지로 알려진 J(자기 통제에 능한 판단형)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하겠다. 기념일 데이트 할 때를 제외하고 내 사전에 계획은 거의 없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 불안이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불안이’ 캐릭터가 영락없는 J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난 불안 때문에 계획에 상당 시간을 할애하는 불안이와는반대로 세상 즉흥적인 P(인식형)에 가깝다. 굳이 MBTI로 날 소개한다면 평소 일상과 일할 때 유형이 다르다. 어느 정도 자리 잡힌 업무(원고 쓰기, 강의안 준비)를 할 땐 불안이라는 감정 해소를 위해 오지 않은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는 편이다. 다만 레퍼런스(참고자료)를 찾을 땐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라서 추진력이나 끈기 따위가 좋은 편이긴 하다. 다른 말로 하면 부분적 게으름과 부분적 성실함의 컬래버레이션이다.
내가 하는 미래 위험 대비란 ‘메모’다. 웬만하면 과거 메모로 해결이 된다. 특히나 불안이, 슬픔이 등 얼핏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을 때 그 불편함을 놓치지 말고 포착해 내면 그 자체로 예술적 기술을 발현할 수 있다. 날것의 감정 그대로가 아니라 문장으로 말이 되도록 표현해 내는 것이 글쓰기 실력이 느는 비법 중 하나다. 우리는 부정적일 때 예민해지고, 예민해질 때 섬세해진다. 평상시에도 촉수를 뻗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게 무슨 느낌인지 조차 모를 땐, 불편한 감정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설명하려고 애쓰는 게 훈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성적으로 외부 자료를 내 경험과 사유에 적절히 입혀서 수시로 메모해 두는 것도 또 다른 정리법이다.
메모로도 안 되면 어떻게 하냐고?
시선을 돌려 환기하는 작업을 한다. 시간을 갖는 거다. 동네를 산책하고 온다거나 무관한 주제의 영화를 감상하는 식으로. 글쓰기 주제 혹은 이미 작성해 놓은 초고와 멀리 떨어져 객관성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렇게 환기하고 나면 시간은 지나지만, 꼭 필요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글이 써지지 않을 땐 첫 번째로 그동안 수시로 써놓은 메모장이라는 창고를 개방하면 나아진다. 그걸로도 안 될 때 ‘우리 잠시 시간을 갖자’라며 글쓰기와 거리를 두고 시간을 갖는 거다. 연인 사이에선 이별의 예고 같은 말이겠지만, 글쓰기는 내가 살아있는 한- 평생 함께할 숙명이기에 이별과는 무관하다. 과감하게 시간을 가지면 될 일이다.
어떻게든 쓰는 방향으로만 가면 된다. ‘글쓰기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라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내 경험상 ‘마감기한(Deadline)’을 두고 글을 쓰는 것은 적절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왜’ 글을 쓰는지 재차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며 마음가짐(Mindset)을 다시 하도록 돕는다. 마감효과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죽음을 생각했을 때 생생한 삶을 살아가는 활력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정리해 보면, 제일 먼저 메모를 수시로 해두는 습관부터 전제로 한다. 그리고 글 주제와 내 글을 공개할 플랫폼, 마감기한 이렇게 세 가지 정도는 최소한 정해두는 게 좋다. 글쓰기 루틴으로 약 두 달(평균 66일) 정도 반복하여 몸에 자동화가 되면 어느새 뭐라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뭘 빼야 할지 고민하는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