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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Apr 27. 2024

16장 비우고 고요해져라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길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본문


궁극의 비움에 이르고 짙은 고요함을 지켜라.


만물이 함께 어우러질 때(무성해질 때), 나는 그 되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나다 각자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고요함인데, 이를 가리켜 운명(천명/소명)을 회복한다 말한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가리켜 항상성(법칙)이라 부르는데, 이 항상성을 아는 것을 밝음(이치에 밝은 / 이치를 깨달은)이라 말한다. 항상성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항상성을 알면 포용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다면 공공성을 얻을 것이니, 공공성을 얻는 사람이 곧 왕이 될 수 있다. 왕은 곧 하늘이고, 하늘은 곧 도이며, 도는 곧 영원하니, 생이 다하도록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순탄하게 지날 것이다).



해설


궁극의 비움과 짙은 고요함이라. 뭔가 사람을 멋있게 만드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살아간다는 의미랑도 맞닿아 있다. 노자는 계속해서 비움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번엔 궁극의 비움이다. 블랙홀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모든 빛과 에너지가 흡수되는 곳. 시공간이 뒤틀리는 곳,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준이 흐트러지는 곳, 그래서 ‘사건의 지평선’이라 부르는 곳. 모든 소리도 사라지겠지.


그 정도 돼야 짙고 짙은 고요함이 존재할 것이다. 아주 고요한 곳에 가면 마음의 소리가 잦아들고 낮아지면서, 그제야 새 소리가 들리고 자연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 순간엔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연히 들려오는 소리.’ 내가 있는지조차 망각하고, 심리의 경계이자 존재의 경계마저 사라지는 상태.


인생영화 중 하나인 <인스텔라>를 보면,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묵음(소리 없음)으로 대변되는 우주였다. 그렇다 우주엔 소리가 없다. 적막. 그 적막을 영화로 직접 구현해 낸 것도 놀랍지만, 너무나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에 다시 주목할 수 있었다. 이 영화에도 블랙홀이 등장한다. 그보다 중요한 건, 소리가 인간에게만 중요한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또다른 방식의 이해를 원한다면 얼마 전 생을 마감한 영화음악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의 <async>라는 음반을 들어보눈 걸 추천한다. ‘소리’와 ‘음악’에 대한 류이치의 철학과 사색을 느낄 수 있다. 우주와 존재에 대한 고찰, 소리와 음악의 경계와 경계 없음에 대한 그의 주제의식을 통해, 우주가 무엇인지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다만, 듣다보면 이것이 음악인가 싶다).


한편, 노자에게 고요함은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바로 ‘회귀’다. 본래의 자리, 근원의 장소로 돌아간다는 의미. 끝없이 변화하고 정해진 자리가 없는 21세기 플랫폼 시대와는 정반대의 길이기도 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위안감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삶에 지쳐 시골로 떠나 정겨운 식사 한 번 하고픈 이들에겐 아마 반가운 소리일 것이다.


노자는 왜 본래의 자리와 근원의 장소를 상정했을까. 그리고 왜 그곳으로 돌아가는 회귀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보았을까. 이는 모든 존재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참 특별한 사건이나, 그 생명이 죽으면 휘리릭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를 ‘덧없다’ 말한다.


그렇다. 인도와 불교에서 바라보는 까르마와 윤회, 그리고 해탈로 이해할 수도 있다. 까르마는 본인이 지고 가야 할 존재의 짐(또는 무게)을 가리킨다. 그 까르마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이것이 사라지면 곧 해탈이다.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본래의 자리 근원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그 생을 살아온 만큼의 업장이 소멸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것은 끝없이 되풀이된다. 항상성이란 변하지 않는, 영원함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법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자는 모든 것이 각자의 자리로 회귀한다는 그 항상성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보았다. 밝다는 것은 이치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삶과 존재의 덧없음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경영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정치(철학자, 다시 말해, 철학을 공부한 최고의 엘리트가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 사람이어야 세상을 포용할 수 있고, 포용성을 가질 때 공공성을 가질 수 있겠지. 공공성이란 모든 이가 인정하는 정치적 정당성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이를 ‘천명’이라 불렀다.


정치적 정당성, 정치를 해야 하는 자격 또는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에게는 소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갈 자격 또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곧 소명이다.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만 꼭 종교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삶의 덧없음을 이해하는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흔한 말로 공명정대한 정치를 실현할 테니 말이다.


비우고 고요해져라. 자신의 소명을 찾고 이루어라. 그것이 곧 부와 풍요에 이르는 길일 테니.


*소리와 음악, 그리고 존재에 대한 사색, <async>

https://brunch.co.kr/@nullurala/284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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