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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Apr 20. 2024

14장 도의 실마리를 붙잡고

삶의 실마리를 찾아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본문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리켜 ‘이(평평함)’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부분을 가리켜 ‘희(희미함)’라 하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부분을 가리켜 ‘미(미세함)’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뗄 수 없어 한데 엮어 하나로 본다.


그 위라고 해서 더 밝지도 그 아래라 해서 더 어둡지도 않고(위 아래를 구분할 수 없고), 비존재(구체 사물이 아닌)로 돌아가니 이를 가리켜 ‘형상 없는 형상’이라 부른다. 비존재의 형상이니(개념이나 이미지로 그려낼 길 없으니) 그저 ‘황홀(신비롭다)’하다 표현할 따름이다.


앞에서 맞이해도 그 머리(처음)를 볼 수 없고 뒤에서 따르더라도 그 꼬리(끝)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옛부터 전해오는 도를 부여잡아 오늘의 일들을 다스린다면, 그 시작을 알 수 있으니 이를 가리켜 ‘도의 실마리’라 부른다.



해설


이, 희, 미. 정말 하나의 우주론을 보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은 그 무엇. 위도 아래도 분간이 안 되고, 있긴 한데 확인도 안 되는 그 무엇. 1장에서도 보았듯 노자는 이 우주가 인간의 인식으로는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곳이라 보았다. 그저, 황홀하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원자보다 전자보다 더 작은 세계인 양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미경으로도 들여다 볼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는 그들만의 물리 법칙이 있다. 실험 조건에 따라, 다시 말해, 어떤 의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무엇을 관찰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 달라진다. 이처럼 특정한 개념이나 이미지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노자는 ‘형상이 없는 형상(딱 이것이다 말할 수 없어서)’이라 불렀고, 이를 가리켜 아득하고 그윽하다(새벽 물안개 낀 호수마냥)고 말했을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모든 걸 알 순 없지만 이 세계를, 우주를 지탱하는 근본의 도가 있다고. 앞에서 맞이해도 뒤에서 따라가도 포착할 수 없지만, 그런 도가 있다고. 그 도를 따라가라고.  


여기에서 말하는 도를 너무 뜬구름 잡기 식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날 표현으로 법칙이고, 이치이고, 원리이다. 도는 팩트이고 현실이기도 하다. 양자역학 이야기로 14장을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것을 깨닫는 전통적인 방법은 오랜 사색과 명상, 그리고 세세한 관찰과 독서 같이 인간의 의식을 고양하는 것들이다.


노자에게는 이것이 고요함이요 비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관조의 삶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듯 같다. 고요하게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곧 관조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삶에서 한 발짝 비켜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자 능력이다.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잡으려 하지 않을 때, 삶의 비밀도 우주의 비밀도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14장을 조금 더 다르게 해석해 보자.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하면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다. 어떤 의도를 가지면 오히려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면 그 마음을 알고자 하면 상대는 그 마음을 더 숨기려 한다. 반대로 더 이상 알고 싶어하지 않을 때, 단념했을 때, 그 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우연찮게 만들어진(물론 신에 의해서 또는 밝혀지지 않는 법칙에 따를 수 있지만), 어디선가 툭, 하고 떨어진 행성이다. 그리고 그 행성에 인류가 생겨났고, 어느날 한 인간이 태어난다. 그렇게 자기의 삶을 시작하고,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쓴다. 좌충우돌하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온갖 쓴맛과 단맛을 보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모르고, 왜 살아야할지 모르나,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고, 살아야 하니 살 수밖에 없지만, 더 나은 삶, 더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마음이다. 노자의 말대로 부여잡을 것 하나 없는 이 우주에도 ‘도의 실마리’는 있다 하니, 그러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지 않은가. 다만 그것을 알아야 하지만.  


공자는 이를 온고지신으로 표현했다. 옛것을 알고 새것을 배우는 일. 다시 말해, 과거의 도, 이때 말하는 과거의 도는 요순 시대를 의미한다. 공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대이자 태평성대의 시대로 부와 풍요가 넘쳤던 시대이다. 공자와 노자가 말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나 결국은 더 나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는 같다.


고대인이 말하는 고양된 의식이 삶에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가 살아갸야 할 이유와 목적을 알아가는 일이다. 그렇게 나에게 드러나는 그 실마리(미로를 빠져나오는 실마리처럼)를 부여집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무엇을 실현해야 할지를 안다면 분명 충만하고 훌륭한 삶을 이루리라 믿는다. 그것을 찾고자 노력한다면 분명 삶이 그 해답을 던져줄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희망을 잃지 말자.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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