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뿌리 깊은 순응의 역사

복종이 만든 질서, 침묵이 지탱한 사회

by NAHDAN

드디어, 책 『방관의 섬 傍観の島、日本,』의 본문 게재를 시작합니다. 19세기 말 서구유럽사회에 인도, 중국에 이어서 커다란 일본풍을 유행시키고, 유럽인들이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추억하는 문화적 향수의 표본인 '벨에포크(Bell Epoke)의 한 단면은 분명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 이후, 발빠른 근대화 과정에서 그들이 꺼내놓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비탄적인 그들의 창조성이었습니다.


비록 일본 군국주의의 폐단이 20세기의 절반을 채워 놓았다고는 하나, 일본의 문화력은 그야말로 20세기의 현대적 감성제국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지난 '잃어버린 30년'을 꽉 채우고도 여전히 회복과 극복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한 때는 성공과 성취를 향해, 조직에 충성하며, 대의 명분을 따라 가열차게 움직이던 일본, 그리고 좁은 작업실과 사무실에서, 전세계인을 감동시킬만한 우주적 기획력과 창조력을 발휘했던 그들이 이제는,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섬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 이어령 교수가 지적했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가져왔던 그 섬세한 몰입성이 그들 스스로 만든 벽에 가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많은 학자, 기업인, 연구자들에게 많이 물었습니다. 인터넷 검색 엔진과 번역기를 돌려가며 최근 일본의 혐한 서적 뿐만 아니라 몇 십년 전에 발간된 일본 문화 비평서, 최근의 논문까지 찾아 읽으면서 이메일과 화상회의로 책에서 다룰 의제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가 있을 때 메모했던 깨알같은 워딩들을 다시 찾아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더 늦지 않게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죠.


우선 일본 역사 속에서 '순응'과 '일본식 공리주의'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말입니다. 이제 제1부 : '뿌리 깊은 순응의 역사' 속 1장 '무사의 칼날 아래 - 천년의 순응 DNA'부터 시작합니다.





1

무사의 칼날 아래 - 천년의 순응 DNA



일본잃어버린30년.jpg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모순이 따른다. 섬세한 미의식과 잔혹한 침략의 역사, 혁신적 기술력과 완고한 관료주의, 예의바른 국민성과 무책임한 집단 침묵.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민족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2025년 현재,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넘어서며 더욱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GDP 대비 국가부채 261%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위기 상황에서도 혁명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연평균 1% 미만의 성장률로 정체된 경제, 극우 정당 참정당이 1석에서 14석으로 약진한 정치적 혼란, '사토리 세대'와 'だるい 세대'로 불리는 청년층의 무기력까지. 그럼에도 일본 사회는 여전히 조용하다.


이 침묵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정신적 뿌리, 그들의 DNA 깊숙이 새겨진 '순응의 원형질'을 들여다봐야 한다. 천 년을 이어온 이 순응의 유전자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왜 오늘날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




섬의 숙명, 도망갈 곳 없는 땅


일본 열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일본인의 순응 문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섬나라에서 백성들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었다. 대륙의 농민들처럼 변방으로 피할 곳도, 유목민처럼 이동할 자유도 없었다. 중국 대륙에서 폭정에 시달린 농민들은 산으로, 변방으로, 때로는 이민족의 땅으로까지 탈출할 수 있었다.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었다.


바다는 그들을 보호해주었지만 동시에 감옥이기도 했다. 결국 주어진 땅에서, 주어진 지배자 아래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는 저항보다는 적응을, 변화보다는 순응을 선택하게 만드는 근본적 조건이었다. 더욱이 일본은 세계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 번도 외침에 의해 왕조가 바뀐 적이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인 것이다.


카미카제2.jpg 신이 태풍을 일으켜 여몽연합군의 침입을 막아주었다고 하는 신풍공세도(新風攻勢図)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몽골(원)의 침입도 태풍이 막아주었고, 근세에 들어서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도 교묘하게 피해갔다. 이는 분명 축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외부의 충격을 통한 변화와 혁신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고, 내부의 모순이 누적되어도 폭발할 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수백 번의 왕조 교체를 겪으며 끊임없이 사회구조를 갱신했고, 유럽은 십자군 전쟁부터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격변을 통해 근대적 시민사회를 만들어냈다. 반면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라는 단 한 번의 '혁명'만으로 근대화를 이루어내야 했다.


그런데 이 메이지유신조차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었을까? 그것은 민중의 자발적 각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급 무사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서구 열강의 압박이라는 외부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지배층이 스스로 변신한 것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으로 말하면, 일본은 '과학 혁명'이 아닌 '정상 과학'의 방식으로만 변화해온 셈이다. 기존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선은 있었지만, 틀 자체를 바꾸는 근본적 전환은 없었던 것이다.





에도 막부 250년, 완벽한 통제 사회의 유산


일본인의 순응 DNA를 가장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에도 막부 시대의 250년간 지속된 완벽한 통제 체제였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연 이후, 일본은 세계사상 유례없는 안정된 봉건제를 구축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는 단순한 사회 계층 구분이 아니라, 개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까지 규정하는 절대적 틀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을 찾은 서구인들이 가장 놀란 것도 바로 이 질서정연함이었다. 영국의 외교관 어니스트 사토우는 1862년 일본에 도착한 직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인다. 각자가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며,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사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농민은 묵묵히 연공을 바치며, 수공업자는 기술 전승에 매진하고, 상인은 천대받으면서도 경제를 떠받쳤다. 각자의 자리에서 불만을 품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질서는 단순히 폭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지 않았다. 물론 막부의 무력이 뒷받침되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질서가 일종의 미덕으로 내재화되었다는 점이다. 유교적 충효 사상과 불교적 인과응보론, 그리고 신토적 조화 정신이 결합하여 독특한 일본식 순응 문화를 만들어냈다. 저항보다는 순응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이자 생존 전략이 되었고, 이는 개인의 도덕적 완성으로까지 승화되었다.


1920px-Sankiko02.jpg 소노베번 참근교대 행렬도


특히 주목할 점은 에도 막부의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제도다. 각 번의 다이묘들을 1년씩 교대로 에도에 머물게 하고,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두는 이 제도는 단순한 정치적 통제를 넘어서 일본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감시 체계로 만들었다. 다이묘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에도와 영지를 오가야 했고, 이는 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켜 반란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전국적인 교통망과 숙박업, 운송업이 발달하면서 일본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경제권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안정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250년간 지속된 쇄국정책으로 일본은 서구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1720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의 수입을 허용했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오는 '난학(蘭学)'도 일부 지식인들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결국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이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일본은 200년 전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봉기 없는 나라, 침묵하는 시민사회


일본사에서 가장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규모 민중봉기나 의병활동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의병운동, 중국의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 유럽의 시민혁명, 러시아의 농민봉기 같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일본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에도 시대에도 '잇키(一揆)'라 불리는 농민봉기가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수준에 그쳤다. 1637년의 시마바라의 난이 가장 대규모였지만, 이 역시 종교적 탄압에 대한 절망적 저항에 가까웠고, 체제 전체를 바꾸려는 혁명적 성격은 없었다. 더욱이 이 난을 진압한 후 막부는 기독교를 완전히 금지하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을 뿐,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하려는 구조적 개혁은 시도하지 않았다.


Capture_2025_0906_120252.png 1700년 ~ 1870년 사이의 잇키(一揆, 백성들의 봉기)와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 마을 사람들이 부잣집을 때려 부수는 행위) 발생 건수 그래프


이는 다른 나라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국에서는 진시황 이후로만 계산해도 수백 차례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그 중 상당수가 왕조 교체로 이어졌다. 한나라의 적미의 난, 당나라의 황소의 난, 명나라 말기의 이자성의 난, 청나라의 태평천국의 난 등은 모두 기존 체제를 뒤흔드는 거대한 사회변혁이었다. 유럽에서도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 1381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 1524년 독일의 농민전쟁 등 끊임없는 민중봉기가 봉건제의 해체와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을 앞당겼다.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는 이런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우선, 에도 막부의 통치 방식이 매우 정교했다. 농민들에게 완전한 절망을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유를 허락하지도 않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수탈을 조절한 것이다. “농민은 죽지도 살지도 않을 정도로 다스려야 한다”는 막부의 통치 철학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감시의 그물망이 사회 전반을 촘촘히 덮고 있었다. ‘고닌구미(五人組)’ 제도를 통해 다섯 집씩 묶어 서로를 감시하게 했고, 밀고를 장려했다. 공동체 내부에서 이탈자를 색출하도록 만든 이 장치는, 개인이 집단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종교의 통제다.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단가(檀家)’ 제도를 통해 모든 주민을 등록·관리했으며,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는 철저히 금지했다. 신앙은 자유를 여는 길이 아니라, 체제의 틀 안에 묶어두는 또 하나의 족쇄로 작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제도적 장치들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사회의 지리적·경제적 조건에 있었다. 일본은 한반도나 중국 대륙처럼 농경 기술이 발전할 토양을 갖추지 못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였고, 경작 가능한 땅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가축을 사육할 만한 넓은 초지도 부족했으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획은 가능했으나 이를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은 취약했다.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갯벌조차 드물었으므로, 어업 자원의 안정적 활용 역시 제약을 받았다. 결국 산지 개간이나 농지 개량을 위해 대규모 노동력을 집중해야 했지만, 이를 가능케 할 중앙집권적 통제력은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지역 다이묘와 무사 세력의 분절적 지배 아래 파편화된 삶을 이어갔고, 대규모 사회 변혁이나 저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는 형성되지 못했다.


이러한 지리적 한계는 필연적으로 소규모 자급 농업과 봉건적 지역 분권 구조를 낳았다. 산지를 개간하거나 농지를 대규모로 개량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적 합의와 중앙집권적 노동 동원이 필요했으나, 일본은 그러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지역 다이묘와 무사 세력의 직접적 통제 속에 파편화된 삶을 살아야 했으며, 대규모 사회적 연대와 저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은 애초에 허물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의 정신적 기질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집단 갈등을 회피하고,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와(和)’의 정신이라 불리는 이 특성은 쇼토쿠 태자의 17조 헌법 제1조, “화를 귀하게 여기고 거스름이 없기를 종지로 삼으라”는 구절에서부터 이미 뿌리내려 있었다. 갈등이 발생하면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우회하거나 인내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공동체 결속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지만, 동시에 사회 변혁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굴레가 되었다.





메이지유신의 역설, 위로부터의 혁명


1868년 메이지유신은 분명 일본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화였다. 250년간 지속된 막번체제가 무너지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가 탄생했다.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라는 기치 아래 서구식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혁명'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민중의 자발적 각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과 서구 열강의 외압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사쓰마, 조슈, 토사, 히젠 등 서남 웅번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이들은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 기존 막번체제의 한계를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부국강병'을 통해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었다. 즉, 수단은 바뀌었지만 목적은 여전히 기존 지배층의 이익과 일치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물론 '에에자나이까(ええじゃないか)' 같은 민중문화 운동이 있었고, 일부 농민들이 폐번치현에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체제 변혁을 위한 조직적 운동이라기보다는 일시적 흥분상태에 가까웠다. 결국 메이지정부는 민중의 동의나 참여 없이도 위로부터의 강력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런 특성은 메이지 이후 일본의 정치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변화는 항상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고, 아래에서는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1889년 메이지 헌법도 천황이 신민에게 '하사'한 것이었고, 1925년 보통선거법도 민중의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위정자들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심지어 1945년 패전 이후의 민주화도 GHQ(연합국최고사령부)라는 외부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혁명, 러시아 혁명 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경험한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명확해진다. 이들 나라에서는 민중이 직접 바리케이드를 쌓고 기존 체제와 맞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형성되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체화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변화가 항상 '선물'처럼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동기나 능력이 부족했다.





현대 일본의 침묵, 체념으로 포장된 무기력


2025년 현재 일본 사회를 바라보면, 천 년 전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져온 순응의 DNA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잃어버린 30년'이 지속되고 있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경제는 사실상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 1995년 세계 2위였던 1인당 GDP는 2023년 현재 30위권으로 추락했다. 국가부채는 GDP의 261%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럼에도 연평균 성장률은 1% 미만에 머물고 있다.


사토리세대.jpg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활력의 소멸이다. 젊은 세대는 '사토리 세대(悟り世代)', 'だるい 세대(나른한 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체념과 무기력에 빠져 있다. 이들은 경제성장이나 출세에 대한 욕망 자체를 포기했다. '어차피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만연해 있다. 2020년 일본 내각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대 청년들 중 71%가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이는 미국(43%), 독일(48%), 프랑스(41%)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만족일까? 오히려 이는 체념으로 포장된 무기력에 가깝다. 같은 조사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답한 일본 청년은 18%에 불과했다. 미국(65%), 독일(46%), 프랑스(41%)와 비교하면 절망적인 수준이다. 즉, 일본 청년들은 현실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답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다. 2025년 참의원 선거에서 극우 정당 참정당이 1석에서 14석으로 급성장했지만,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조직적 반발은 미미했다. 유럽이라면 당장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을 상황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몇몇 지식인들의 우려 표명과 SNS상의 논란으로 끝났다. 자민당이 과반을 잃고 연立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정치적 격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일본 특유의 '공기 읽기(空気読み)' 문화가 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집단의 분위기를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다. 이는 조화를 유지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변화의 동력을 약화시킨다. 누구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먼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공기를 못 읽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디지털 전환의 지체, 아날로그 일본의 고집


일본의 순응 문화는 디지털 전환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정부를 구축하고, 중국이 모바일 결제와 슈퍼앱으로 사회 전체를 디지털화한 것과 달리, 일본은 여전히 '아날로그'에 머물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일본 정부에는 아직도 9,125개의 아날로그 규제 조항이 남아 있다. 팩스, 도장, 종이 서류가 여전히 행정과 기업 업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아날로그문화.png


COVID-19 팬데믹 시기, 일본의 디지털 후진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재택근무가 어려운 이유가 '도장을 찍기 위해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 다른 나라보다 몇 달씩 늦어진 이유도 온라인 시스템의 부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시다 내각이 '디지털 전환'을 국정과제로 내세웠지만, 실제 진행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이는 일본 사회 전반에 깔린 '변화에 대한 거부감'과 직결된다.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효율성보다는 안정성을 선호하는 문화적 특성이 디지털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의 의사결정 구조인 '네마와시(根回し)'는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다. 모든 관련자들의 사전 동의를 구하는 이 방식은 농업사회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빠른 변화가 요구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일본의 대표적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했다. 반면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미국 기업들과 삼성, 네이버, 카카오 같은 한국 기업들은 디지털 전환을 통해 성장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력의 차이가 아니라, 변화에 대응하는 조직문화의 차이다.





창조력의 고갈, 미야자키 이후의 공허함


일본이 자랑하던 콘텐츠 산업마저 위기에 빠져 있다. 한때 세계를 매혹시켰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블랙화'로 인한 쇠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애니메이터들의 극도로 열악한 근무 환경,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이 만성화되면서 인재들이 업계를 떠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세대 이후 세계적 수준의 크리에이터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하야오.jpg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곤 사토시 같은 거장들이 활동했던 1980-2000년대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이들 이후 세대는 이전 세대의 성공 공식을 답습하는 데 그치고 있다.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이나 새로운 표현 기법의 개발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봉준호, 최동훈, 연상호 같은 감독들이나 중국의 웹툰과 게임 산업이 더 혁신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일본 사회 전반의 창조력 고갈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순응 문화가 지나치게 뿌리깊게 자리 잡으면서, 기존 틀을 깨는 혁신적 사고가 억압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창의성이나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은 부족하다. OECD의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도 일본 학생들의 수학, 과학 성적은 높지만 창의성을 요구하는 문제해결 능력은 상대적으로 낮다.


젊은 세대의 ‘사토리’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 뿐이다. 마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듯, 욕망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투쟁조차 내려놓은 채 살아간다. 그것은 저항이 아니라, 저항을 포기한 체념의 문화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1960년대 서구의 히피 문화나 한국의 386세대가 보여준 저항의 몸짓과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목격한다. 그들은 체제를 향해 분명한 부정을 외쳤고, 또 다른 대안을 찾아 몸부림쳤다. 그러나 일본의 청년들은 무력감 속에서, 애써 분노를 억누른 채, 마치 스스로를 사회의 주체에서 지워버리려는 듯 방관자의 자리로 후퇴한다. 이 침묵의 선택은 일본 사회의 오랜 관습과 무사(武士)의 그림자 속에서 길러진 수동성과 무관하지 않다.


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무사의 칼날'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 칼날은 더 이상 눈앞에 번뜩이는 철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압력과 은밀한 규범으로 여전히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 위계와 체면, 눈치와 순응, 이 보이지 않는 칼날이 사회 전체를 조용히 조율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변했다. 20세기의 성공 방정식이던 집단주의와 순응주의는 더 이상 생존의 답이 되지 못한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전환, 지구적 위기와 가치의 전환은 각 개인에게 능동적 선택과 참여를 요구한다. 과거처럼 무언가에 기댄 안온한 방관만으로는 다가오는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 긴 잠에서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방관자의 자리에서 세월에 자신을 맡길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인들 스스로가 만들어내야 한다. 그 답을 찾지 못한다면, 일본은 과거의 유산 속에서만 빛나고 현재와 미래를 상실한 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깨어난다면, 그 순간 일본은 다시금 아시아와 세계에 의미 있는 존재로 서게 될지도 모른다. 선택은 오직 일본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참여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일본의 미래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물음이기도 하다.



<다음 글 예정>


제1부

2. 권력의 세습 고리 - 가마쿠라 막부에서 아베 정권까지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02화프롤로그 : 민폐냐, 방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