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방관과 무저항의 속성들

섬나라 일본의 역사 속에서 숙성된 방관과 순응의 기원을 찾아서

by NAHDAN

방관의 섬

傍観の島、日本

- 일본의 역사 속에서 숙성된 방관과 순응의 기원을 찾아서


방관적 합리주의와 무저항 혁신의 늪에 빠진 오늘날의 일본을 말한다

「順応的合理主義の罠に囚われた無抵抗の国、今日の日本を解剖する」





이 책의 주제와 내용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2019년 5월, 동학농민전쟁 1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후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동학농민운동사와 더불어 고려와 조선 시기의 수많은 민란, 그리고 일제강점기 의병 활동의 사료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한국의 민중, 곧 백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과 변혁을 이루어왔는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레 일본 사회와의 대비로 이어졌다. 과연 일본의 농민과 민중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저항해왔는가? 이 질문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문제의식으로 남았다.


그 무렵 나는 일본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한 해 동안 세 차례 일본을 찾았다. 오사카와 교토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재일 학자들과 사료 수집가, 시민활동가들을 만나며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단순한 자료 탐구를 넘어 서로의 역사 인식을 교차시켰고, 일본 사회의 구조적 특징과 문화적 성향을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처음의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일본 사회가 보여주는 것이 단순한 경제 침체나 청년 세대의 무기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훨씬 더 정교하고 체계적인 "방관의 시스템"이었다. 개인의 문제의식이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구조, 모두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는 문화, 책임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스스로는 안전한 방관자의 위치에 머무는 집단심리. 그것이 바로 일본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왜 다시 또, 일본인가?


자주 받는 질문이다. 한국인이 일본을 비판하는 것이 적절한가, 혹시 감정적 편견이 개입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일본에 대한 비판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서이자, 동아시아가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진단서다.


일본은 우리보다 30년 앞서 근대화를 경험했고, 30년 앞서 산업화의 정점을 맛보았으며, 30년 앞서 그 한계와 부작용을 겪고 있다. 일본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고, 우리가 피해야 할 함정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더욱이 나는 일본을 "타자"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식민지 경험을 공유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경험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받고, 유교 문화권의 집단주의와 서구 자본주의의 개인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궤적을 걸어왔다. 일본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방관적 합리주의라는 개념


이 책의 핵심 개념인 '방관적 합리주의'는 일본 체류 중 내가 목격한 수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다. 그것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똑똑하다고 여기는 태도다.


이런 방관적 합리주의는 개인 차원에서는 그럴듯해 보인다. 남의 일에 끼어들어 피곤해질 필요가 없고, 위험을 감수하며 변화를 추구할 이유도 없으며,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에 나서서 책임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태도를 취하면 어떻게 될까? 그 답이 바로 현재의 일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져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정치인들이 온갖 스캔들을 일으켜도 정권이 바뀌지 않으며, 경제가 30년째 침체해도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데 전체적으로는 비합리적 결과가 나오는 사회. 이것이 바로 방관적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우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헬조선', '이생망', '갓수저 흙수저' 같은 말들이 일상화되면서 젊은 세대들 사이에 체념과 냉소가 확산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 우리에게는 1987년 6월 항쟁, 2008년 촛불시위,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 전통이 있다.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래로부터의 변화"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전통도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퇴화할 수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소셜미디어 시대의 파편화된 소통 구조다. 각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는 에코 챔버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회 전체적인 합의 형성이나 연대 의식 구축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일본의 '혼네와 다테마에' 문화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소통 단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책의 구성과 의도


이 책은 총 5부 3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 문화 코드를 분석하고, 제2부에서는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시스템들을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정치와 언론의 방관주의를 다루고, 제4부에서는 경제와 기술 혁신의 정체 현상을 분석한다. 마지막 제5부에서는 미래를 위협하는 위기들과 가능한 대안을 모색한다.


각 장은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일관된 논증 구조를 갖추고 있다. 천년의 순응 DNA에서 시작해서 현대의 방관적 합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해왔는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추적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단순한 일본 비판이나 한국 우월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일본의 문제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그들의 실패에서 우리의 교훈을 얻으며, 동아시아 전체가 직면한 공통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나가자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메시지다.






감사의 말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때로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나의 편견을 깨뜨려준 일본인 지식인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작업을 지켜보며 격려해준 동료 연구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특히 이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함께 토론해준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체념보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방관적 합리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고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일본의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방관자입니까, 참여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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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