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일본 경제의 기적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일본식 고용관행’이었다. 이른바 종신고용, 연공서열, 기업별 노조라는 삼위일체의 시스템은 일본식 경영의 정신을 상징하는 제도로 간주되었다. 당시 학자들과 언론은 이를 “조화와 충성의 자본주의”라 부르며, 서구식 경쟁 중심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모델로까지 찬양했다. 회사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인생의 터전’으로 여겨졌고, 사원은 평생을 바쳐 회사에 충성하며 회사와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이런 이미지 속에서 일본 기업은 마치 가족처럼 따뜻하고, 공동체적 윤리가 살아 있는 조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서사는 처음부터 허상이었다. 종신고용이 적용된 것은 전체 노동자의 약 30%에 불과했으며, 그 대상도 대부분 대기업의 남성 정규직이었다. 나머지 70%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그리고 여성 근로자들이었다. 일본 경제의 황금기를 떠받친 것은 이들 주변부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다. 종신고용의 신화는 실상 ‘배제의 제도’였고, 평등한 가족이 아니라 엄격히 서열화된 가부장적 기업 질서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강요받았고, 하청 기업은 대기업의 비용 절감을 위해 언제든 교체 가능한 구조로 남았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이 제도가 일본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흔히 ‘무사도 정신’이나 ‘충성의 문화’에서 기원한 것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이직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근대적 제도였다. 특히 1920~30년대 중공업 부문에서 숙련공을 붙잡아두려는 경영 전략으로 등장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노동조합의 압력과 고도성장기의 인력 부족이 맞물리면서 일시적으로 보편화되었다. 즉, 종신고용은 전통의 연장이 아니라 ‘고도성장의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경제 여건이 변하자 이 제도는 빠르게 해체되었다.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일본 기업들은 앞다투어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다. 2000년대 들어 도요타조차 “고용을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공식 선언했고, 소니는 2만 명, 파나소닉은 4만 명의 직원을 감원했다. ‘평생 직장’의 약속은 무너졌고, 젊은 세대는 더 이상 ‘회사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지 않았다. 그 대신 ‘프리터(freeter)’와 ‘파견노동자’라는 새로운 신분이 급증했다. 2024년 현재 일본의 비정규직 비율은 40%에 달하며, 20대 청년의 41%가 비정규직이다.
종신고용의 신화는 완전히 붕괴했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일본 사회의 의식 속에 남아 있다. 직장을 잃은 중년 남성들은 자신을 ‘무용한 존재’로 여기며 깊은 우울과 자기혐오에 빠지고, 청년들은 조직에 헌신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사회학자 나카무라 신이 지적했듯, “일본의 노동은 이미 해체되었지만, 노동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화는 제도로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감옥’으로 남아, 개인이 자신을 회사와 동일시하도록 만든다.
결국 일본식 고용관행의 신화는 경제의 성장기를 떠받친 도구이자, 동시에 한 세대의 정신을 속박한 신앙이었다. 그것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계약의 윤리가 아니라, 여전히 ‘회사 없는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립만이 남아 있다. 신화는 사라졌지만, 신화가 남긴 그늘은 여전히 일본 사회의 심층에 드리워져 있다.
일본의 직장인을 가리키는 '샐러리맨'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들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월급을 받는 존재일 뿐,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니다. 회사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부속품으로서 기능할 때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것이 바로 '사축화'의 핵심이다.
사축화의 첫 번째 단계는 신입사원 때부터 시작되는 전면적인 세뇌 과정이다. '신졸일괄채용'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대학 졸업 예정자들을 일시에 선발하여 몇 달간의 집중적인 기업문화 교육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철저히 해체되고 회사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주입된다. 서구의 직장인들이 특정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용되는 것과 달리, 일본의 샐러리맨은 회사 전체에 소속되어 어떤 업무든 수행할 수 있는 범용적 부품으로 양성된다.
두 번째 단계는 무한 순환 배치를 통한 정체성 분산이다. 2-3년마다 전혀 다른 부서로 이동하며 새로운 업무를 익혀야 하는 순환근무제는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주는 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기를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장치다. 회계부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마케팅부로, 다시 인사부로 옮겨 다니는 동안 개인은 점점 더 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만의 전문성이나 독립적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총체적 시간 점유를 통한 사생활 박탈이다. 일본에는 '카로시(過労死)'라는 독특한 단어가 있다. 과로사, 즉 과로로 인한 죽음을 뜻하는 이 단어가 옥스퍼드 사전에까지 등재된 것은 일본 직장 문화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비스 잔교(サービス残業)', 즉 무급 초과근무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따로 용어가 있을 정도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 직장인의 평균 실제 근무시간은 공식 통계보다 월 30시간 이상 길다.
문제는 단순히 근무시간이 길다는 것이 아니다. 퇴근 후에도 상사나 동료들과의 회식이 사실상 강제되며, 주말에도 골프나 각종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개인적 행사조차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이렇게 24시간 365일 회사에 얽매인 샐러리맨들은 점차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회사만이 자신의 전부인 상태에 빠진다.
일본 사회를 설명할 때 늘 등장하는 개념이 ‘집단주의’다. 하지만 이 단어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공동체적 가치의 표현이라기보다 위계와 복종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진정한 집단주의라면 구성원 모두의 이익과 존엄을 고려해야 하지만, 일본식 집단주의는 특정 계층의 권력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조화(和)’라는 단어 아래에서 개인의 차이와 비판은 ‘불편한 진실’로 취급되고, 침묵과 복종이 미덕으로 치환된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일본 직장의 ‘화(和) 문화’다. 표면적으로는 협력과 상호존중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 순응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상사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회의 자리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화를 깨뜨리는 행위’로 간주된다. ‘쿠키 요메나이(空気読めない)’, 즉 ‘분위기를 읽지 못한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낙인이다. ‘공기’를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표정을 살피고, 다수의 기류를 맞추며, 자신의 생각을 검열하는 행위를 뜻한다. 결국 사람들은 말보다 ‘공기’를, 진실보다 ‘분위기’를 우선시하게 된다.
이런 문화 속에서 개인은 점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혼네(本音, 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 겉모습)’의 분리가 생활화되면서, 일본인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분할된 존재로 살아간다. 회사에서의 자신, 가정에서의 자신, 사회 속의 자신이 서로 다른 가면을 쓰고 존재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이런 상태로 살아온 이들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거의 철학적 난제에 가깝다. 30년, 40년 동안 조직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온 샐러리맨에게는 이미 ‘진짜 나’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 있다.
더욱 교묘한 것은 이런 억압을 ‘팀워크’, ‘소속감’, ‘조직 충성’ 같은 긍정적 언어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이기주의’로, 비판적 사고는 ‘불온함’으로 치부된다. 심지어 스스로의 불행을 ‘충성’으로 해석하며, 과로와 희생을 자부심의 언어로 바꾸기도 한다. ‘나는 회사에 필요하다’는 확신이야말로 일본식 집단주의가 제공하는 마지막 보상이다. 그러나 그 보상은 실상, 복종의 감각을 미화한 자가세뇌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작동한다. 정치권에서는 비판보다 ‘조화’를, 시민사회에서는 참여보다 ‘예의’를 중시하며, 언론마저 갈등을 피하려 한다.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으로 간주되면서, 사회적 진보와 변혁의 동력은 사라진다. 그 결과 일본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평온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극도로 긴장된 불안의 사회가 되었다. 각자가 ‘공기’를 읽으며 서로를 검열하는 사회, 그것이 일본식 집단주의의 실체다.
결국 일본의 집단주의는 공동체적 덕목이 아니라, 복종의 미학이다. 개인은 조직을 위해 존재하고, 조직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며, 그 위계의 꼭대기에는 ‘불문율’만이 남는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일본인들이 이런 체제 안에서 오히려 안정을 느낀다는 점이다. 억압이 일상이 되고, 복종이 습관이 되면, 자유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노예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식 집단주의의 가장 슬픈 역설이다.
종신고용의 환상과 ‘사축화(社畜化)’된 개인이 만들어낸 일본 사회의 풍경은 참담하다. 2024년 현재 일본의 자살률은 OECD 평균의 1.6배를 웃돌며, 특히 40~50대 중년 남성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때 ‘평생직장’을 믿었던 샐러리맨 출신으로, 구조조정이나 사업 실패, 혹은 조직 내에서의 퇴출로 인해 생존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이다. 평생을 회사에 바치고도 ‘회사 밖의 자아’를 구축하지 못한 그들은 일터를 잃는 순간 삶의 중심을 함께 잃는다. 그들에게 종신고용의 붕괴는 단순한 고용 상실이 아니라, 정체성의 붕괴다.
이러한 개인의 붕괴는 곧 사회 전체의 활력 저하로 이어진다. 장시간 근로와 상명하복의 문화가 고착된 사회에서 자율적 사고나 창의적 도전이 싹틀 리 없다. 상사가 정한 절차와 관습이 곧 ‘진리’가 되고, 그 체제를 벗어나면 배척당하는 조직에서 혁신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30여 년간 거의 0%에 머물러 있다. ‘잃어버린 10년’은 어느새 ‘잃어버린 30년’이 되었고, 한때 세계를 선도하던 일본 기업들은 디지털 전환의 흐름 속에서 하나둘 퇴장하고 있다.
소니, 도시바, 샤프 등 전자 대기업의 몰락은 단순히 기술적 후퇴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충성’을 ‘창의’보다 중시한 조직문화의 귀결이다. 상급자의 눈치를 보고, 모난 돌이 되지 않으려는 ‘조직인간’의 집단은 변화의 시대에 가장 먼저 퇴보한다. ‘사축화’된 직원들은 성과를 내기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택한다. 혁신의 부재는 결국 일본 사회 전체를 ‘정체의 늪’에 가두었다.
젊은 세대 또한 이 구조 속에서 희생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른바 ‘취업빙하기 세대’는 정규직 진입의 문턱에서 좌절하며 비정규직과 파견노동자로 평생을 떠돈다. 그 위 세대가 ‘종신고용의 환상’에 속았다면, 이 세대는 ‘기회 자체의 부재’ 속에 청춘을 소비했다. 그리고 이제 20대 청년들 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다”고 답한 이들이 50만 명을 넘어섰다. 그들은 일하지 않음으로써 저항한다기보다, 더 이상 일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 사회는 지금, 일과 조직, 개인의 관계를 새롭게 재정의하지 못한 채 붕괴의 시간 속에 서 있다. ‘회사 없는 개인’은 방향을 잃었고, ‘개인 없는 회사’는 생명력을 잃었다. 종신고용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기력한 생존의 일상이다. 일본은 여전히 일하고 있지만, 그 일은 더 이상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이 시스템에서 탈출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한 번 샐러리맨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중도에 나와서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가기는 극도로 어렵다. 전문성이 부족하고, 인맥도 회사 내부에 한정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다.
실제로 일본에서 창업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고, 이직률도 매우 낮다. '스톤 제네레이션'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는데, 이는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젊은 직장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변화는 위험이고, 현상유지가 최선의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사회는 점점 더 경직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도전적 시도는 설 자리가 없고, 기존의 낡은 시스템만 반복 재생산된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라는 구조적 위기 앞에서도 근본적 개혁보다는 미봉책에만 의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종신고용의 환상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사축화된 인간형은 여전히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존재하는 한 일본의 방관주의는 계속될 것이다. 개인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변화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이 일본만의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고용 불안정과 개인의 원자화 현상을 보면, 일본의 오늘이 다른 나라들의 내일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종신고용이라는 특수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개인을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메커니즘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본이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개인의 주체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70여 년간 축적된 사축화의 관성을 뒤집는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방관의 섬에 갇힌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종신고용은 오랫동안 일본 사회의 안정과 신뢰를 상징했다. 기업은 직원의 생애를 보장했고, 직원은 헌신과 충성으로 화답했다. 전후 재건기의 불확실한 시대에 이 제도는 사회적 신뢰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일자리를 얻는 순간, 인생의 경로가 결정되는 구조 속에서 일본인은 ‘회사에 속한다’는 사실 자체로 사회적 존재감을 얻었다. 종신고용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일본적 근대의 사회적 토대였다.
그러나 그 안정의 이면에는 통제의 논리가 숨어 있었다. 기업은 보호를 약속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사고와 판단을 조직의 질서 안에 가두었다. 회사의 평가는 개인의 존재 가치를 결정했고, 자율성은 효율성의 이름으로 흡수되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체계의 리듬에 따라 움직였으며, 결국 사고의 방향조차 위로부터 주어졌다.
사회학자 나카네 지에(中根千枝)는 『일본적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구조를 “수평적 연대가 아닌 수직적 소속에 의한 정체성의 질서”라 설명했다. 개인은 스스로를 ‘어떤 가치관을 지닌 존재’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가’로 평가받는다. 이때 집단의 중심이 바로 회사이며, 상사는 단순한 관리자 이상으로 개인의 도덕과 행동의 기준이 된다.
이 체계는 일본이 산업화의 절정기를 맞은 1970~80년대에 절대적 효용을 발휘했다. 도요타, 소니, 미쓰비시 등은 세계 시장을 지배했고, 일본의 GDP는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장시간 노동, 연공서열, 집단 충성은 효율과 품질의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 체계는 동시에 인간의 사고 능력을 억제했다. 안정은 자율의 대가로 주어졌고, 충성은 사고의 종말로 이어졌다.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内田樹)는 이 시기를 두고 “한 번의 성공이 하나의 이념으로 굳어져, 실패조차 성찰의 계기가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 사회는 그가 말한 ‘문화적 무력감’ 속에서 사고의 동력을 잃었다. 성공은 반성의 능력을 제거했고, 체계는 자신을 절대화했다. 조직은 변화 대신 관성을 택했고, 구성원들은 체계의 연장선 속에서 스스로를 정의했다.
199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변화는 없었다. 기업들은 제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종신고용을 유지하려는 관성만 강화했다. 하지만 그 체계는 이미 현실과 맞지 않았다.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조직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정의 신화는 무너졌지만, 그 신화를 내면화한 사고 방식은 남았다. 그것이 바로 일본 사회를 정지시킨 방관의 정신 구조였다.
일본의 종신고용제는 본래 기업과 개인이 함께 성장한다는 상호책임의 이상을 품고 있었다. 기업은 평생의 고용을 보장하며 직원의 생애를 보호하고, 직원은 헌신과 근면으로 조직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전후 재건기의 불안한 사회에서 이 제도는 개인에게 확실한 예측 가능성을 주었고, 일본 사회의 안정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종신고용은 개인의 성장 기반이 아니라 조직의 효율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 장치로 변질되었다. 개인의 삶은 제도 속으로 흡수되었고, 조직의 논리가 인간의 의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일본의 종신고용제가 지속 가능한 성장의 틀이라기보다, 통제된 안정의 시스템으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리더십의 주도권은 철저히 기업의 상층부에 집중되었고, 직원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수행자’로 한정되었다. 기업은 구성원에게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명령 체계와 절차적 순응을 요구했다. 개인은 판단의 주체가 아닌 실행의 수단이 되었고, 조직은 효율을 명목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서서히 제거했다. 상명하복의 문화 속에서 창의적 발언은 ‘위계의 균열’로 간주되었으며, 일본의 조직문화는 스스로 변화를 억압하는 폐쇄적 체계로 굳어졌다.
이 체계는 겉으로는 질서와 생산성을 보장했지만, 내적으로는 인간의 사유 능력을 마비시켰다. 기업은 매뉴얼과 절차로 성과를 관리하며, 정량적 지표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했다. 직원은 사고의 존재가 아니라 ‘효율을 구현하는 기술적 주체’로 길들여졌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The Corrosion of Character』에서 “현대 조직은 인간의 장기적 정체성과 내적 통합성을 해체하며,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일관된 자아를 부식시킨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종신고용 체계 역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안정된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점차 자기 서사를 잃고 조직의 시나리오에 종속되었다.
결국 일본의 기업 구조에서 리더십은 개인의 역량을 확장하는 힘이 아니라,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제 메커니즘으로 전락했다. 관리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데 집중했고, 구성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틀 안에서만 사고하도록 길들여졌다. 위계의 최상층은 거시적 판단을 독점했고, 아래층은 세부 실행을 담당했다. 이 구획된 구조 속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일본의 조직은 마치 미세하게 조정된 기계처럼 움직였지만, 그 정밀함이 오히려 사고의 다양성을 소거했다.
그 결과 일본은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 이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문제는 기술력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적 상상력의 결핍이었다. 시스템은 유지되었으나, 그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주체가 사라졌다. 경영학자 다케우치 히로타카(竹内弘高)는 ‘지식창조기업’ 개념을 제시하며 “진정한 혁신은 제도적 효율이 아니라, 조직 구성원들의 암묵지(暗黙知)와 상호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은 그 반대였다. 지식은 체계화되었으나, 인간은 더 이상 그 지식을 창조하거나 갱신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 체계가 인간을 보호하는 순간, 인간은 체계에 예속된다.
이 경직된 조직문화는 오늘의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대기업과 공공조직은 성과관리와 절차의 정교함을 강조하지만, 그 속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감정, 창의성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보고 체계와 KPI가 사고를 대신하고, ‘프로세스 준수’가 도전보다 우위에 놓인다. 일본의 ‘회사인간’이 그랬듯, 한국의 직장인 역시 조직의 한 부속으로 살아가며 스스로의 판단보다 구조의 명령을 우선한다. 관료적 언어와 매뉴얼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점차 관리 가능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경제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적 경로의 문제다. 일본의 종신고용제는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개인의 소멸을 보여준다. 고용은 유지되었지만, 사고는 외주화되었다. 인간은 시스템 속에서 자신을 도구화했고, 그 결과 사회는 안정되었으나 사유는 정지했다. ‘개인의 죽음’이란 바로 그 순간, 인간이 체계의 질서를 내면화하며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포기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동화된 현대 문명 전체의 구조적 징후다.
이제 일본의 경험을 단순한 경제사적 사건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문명이 스스로를 자동화할 때, 인간이 어떤 방향으로 퇴행하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종신고용이 사라진 자리에도 여전히 남은 것은 ‘사유의 결핍’이며, 바로 그 결핍이 현대사회의 공통된 병리다. 문명의 위기는 제도의 붕괴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확산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내면은 더 쉽게 시스템에 위탁되고, 그 위탁은 곧 주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문명은 기술의 발전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잃지 않을 때 지속된다. 일본의 방관주의는 경직된 조직과 효율의 신화를 경계하라는 거대한 거울이다. “당신은 생각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체계의 부속으로 안도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일본을 넘어 오늘의 문명 전체가 응답해야 할 질문이다. 인간이 체계의 일부로 살아가되, 그 체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가—그 물음이야말로 21세기 문명의 생존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