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
엄마는 내가 상담을 받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
“상담사가 뭐래?”
“자기 내면이 문제래.”
내가 건넨 대답에 엄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사실상 전하고 싶었던 건
‘엄마의 내면을 돌아보라’는 뜻이었지만,
그 뜻이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또 같은 지역 남자를 만나
본인들의 체면을 깎아내릴까 노심초사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같은 말을 들었다.
“여기 지역 남자는 만나지 마라.”
“지인의 가족이면 절대 안 된다.”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지금 이런 마음 상태로
어떻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건지,
29살의 나이에 누굴 만난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결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 무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모님의 태도는 늘 나를 벽에 몰아넣었다.
결국 소개팅 자리는 전부 거절했다.
누구를 만나도 헤어지는 순간,
나는 또다시 "창피하다"라는 이유로 내쳐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후배와 술자리를 가진 날이었다.
술에 취해 의식이 흐릿해졌다 깨어났다 반복하던 중,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샌님처럼 생긴 남자가
어느새 내 앞자리 시야에 들어왔다.
후배의 옛 과외 선생님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그는 전 남자친구의 동창이었다.
"소문나게 하지 마라."
엄마와 아빠의 그 따발총 같은 말들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좁디좁은 이 동네에서 전 남자친구의 동창을 만난다는 건
소문이 퍼지기 딱 좋은 일이었다.
며칠 후,
후배를 통해 그 샌님이 나와 연락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번호를 건넸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마.’
‘아빠.’
‘소문.’
‘전 남친 동창’
‘또 쫓겨나려나...’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냥 친한 오빠로 지내면 되지.”
라고 스스로 정리하며 마음을 눌렀다.
그리고 샌님과 단둘이 술을 마신 날,
나는 경악했다.
너무 가까운 집안이었다.
기피해야 마땅한 인연이었다.
‘사촌 동생이 내 동창.’
‘작은아버지가 아빠의 절친.’
‘고모들이 서로 절친.’
‘사촌 동생이 동생과 동창.’
이렇게 가까울 수가 있나 싶었다.
“망했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썸의 기류가 빠르게 흘렀지만,
나는 그의 고백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했다.
“전에 결혼 약속까지 했던 사람이 샌님과 동창이에요.”
“그리고 집안이 너무 가까워요. 만나다 헤어지면 저는 쫓겨날 거예요.”
그러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헤어지면 내가 떠날게!”
앞의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며 울컥했지만,
지금의 남편이 된 그의 이 대사는 여전히 나를 웃게 만든다.
아마도 나는 저 두려움 없는 태도에 끌렸던 것 같다.
저런 사람이라면,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었다.
역시나 나의 마지막 연애는 빠르게 구렁텅이에 빠졌다.
아빠는 샌님의 과외방까지 찾아가,
창문에 붙은 홍보용 번호를 보고는
일방적으로 경고 문자를 보냈다.
여행도, 외박도 불허하며,
이를 어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럽고 분노로 치를 떨었다.
아빠는 샌님을 마주쳐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집에서는 밟혀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컸는데
누가 보면 딸을 극진히 아끼는 아빠 같았을 것이다.
아무 남자에게도 내줄 수 없다는,
영화 속 아버지 같은 모습.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건 엄마의 조종이었다는 것을.
아빠가 독단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진절머리가 났다.
본인들은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아
이 불완전한 가족 구조를 만들고는
결혼을 안 하면 쫓아낸다 하더니,
이번엔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내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다.
‘가족’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가족'이란
상처와 희생, 내 영혼을 팔아야 유지되는 무거운 그림자일 뿐이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는 건 나에게 또 다른 감옥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나에게 샌님은 만난 지 1년도 안 되어
내게 청혼을 했다.
처음에는 결혼만이 내 인생의 탈출구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또 다른 ‘가족’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의 청혼 반지는 힘없이 그의 과외방 책상 위에 놓였다.
<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