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
동생 없이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 허전하고 이상한 기분을
나는 금방 정의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동생을 데리고 다녔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동생 없이는 상담실 문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상담가는 늘 말했다.
“상대방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다시 인지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그 말이 여전히 가슴에 남았다.
그렇게 상담의 초점은 동생에게서 나에게로,
현재가 아닌 과거의 나로 옮겨갔다.
엄마가 22살, 아빠가 25살.
그 어린 두 사람 사이에서 내가 태어났다.
너무 어린 부모, 너무 버거운 현실.
나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
떠난다는 말도 없이 떠나는 부모의 차를
뒷좌석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울부짖던 일.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수없이 물었던 질문들.
"엄마 몇 밤 자고 온대?'
"엄마 언제 온대?"
35살이 된 지금도 선명하다.
어릴 적,
나는 이미 ‘버려질 수 있는 아이’라는
공포를 몸으로 알고 있었다.
동생은 5살이나 어렸고,
‘장손’이었다.
제사상에서 당연한 듯
나는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동생은 ‘대접받는 아이’였다.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해
시집살이가 힘들었다고
술만 마시면 말했다.
이런 기억들이 뒤엉켜
상담가에게 내뱉는 나의 모습에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좋은 딸”이 되려 했는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랑받고 싶어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나는 늘 사랑받는 딸 역할을 하며 자랐다.
상담가와 과거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사이,
차별받던 나뿐 아니라
동생 또한 내가 가늠하지 못한 아픔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모두 어딘가 아팠다.
그 아픔을 풀 데가 없어 서로에게 쏟았다.
아빠가 종종 해주던 충격적인 이야기.
할아버지에게 전깃줄로 맞으며 자랐다고.
그래서였을까.
아빠는 화를 내고 싶어도
차마 올바르게 혼낼 수 없었고,
그 역할을 어쩌면 나에게 넘겼던 건 아닐까.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가자
상담실이 뿌옇게 보였다.
가족들의 몫까지 울었다.
우리 가족이 너무 불쌍해 보였기에.
그리고 엄마.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사람.
가장 밉고, 가장 가깝고, 때로는 가장 증오스러운 사람.
그런데 상담을 받으며,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미웠던 만큼
나는 엄마에게서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이런 상상했다.
엄마의 묘 앞에서 후회하며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때 용서해 줄걸...”
“그때 이해하려고 노력해 볼걸...”
그 상상은
내가 엄마를 미워하는 만큼,
엄마를 사랑하고 싶어 했다는 증거였다.
22살에 갑자기 엄마가 된 여자.
하고 싶은 게 산더미였을 텐데
뭐 하나 누려보지 못했을 여자.
예쁜 옷도, 자유도, 안전한 사랑도
충분히 받지 못한 여자.
그런 여자였던 엄마는
내 20대를 지켜보며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을 거라고
가늠만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우리 남매를 불러,
조심스럽게 검정고시 합격증을 내밀던 엄마.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엄마 고등학교 졸업 못한 거 알고 있었어.”
엄마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좀 그랬어.”
그 짧은 말 안에
수많은 서러운 날들이 담겨 있었음을
그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모두 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받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알아주길 바랐고,
받아주길 바랐고,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누구도 배우지 못했다.
상담을 이어가며
나는 가족을 이해해가는 길에 다가갔지만
동시에 너무 안타까웠다.
각자의 마음을
본인이 들여다보고 인정해야만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데,
나는 그 길의 문 앞에 서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 문밖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풀리지 않은 숙제를 남긴 채
나의 상담은 끝자락을 향해 갔다.
<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