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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의 그림자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주재원 파견으로 가족과 함께 잠시 유럽에서 살았다. 당시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그 나라가 프랑스어권이었으니까. 하지만 영어를 배우기도 벅찬 와중에 프랑스어까지 제대로 익히는 것은 무리였다. 일주일에 두 번 뿐인 수업에서 기초반에 머무르며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난 제2외국어를 선택해야 했는데, 고민할 것도 없이 프랑스어를 골랐다. 기초밖에 모르긴 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엔 너무 귀찮았기 때문이다. 주요 수능 과목 공부하기도 힘드니 다른 건 최소한의 인풋만으로 할 수 있는 게 베스트였다. 적당히 기본만 공부해도 수능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기에 충분했다. 어차피 시험을 위해 책으로 배우는 공부 아닌가! 대학에서도 같은 이유로 기초 프랑스어를 교양 과목으로 들었다. 힘들게 수능 입시를 했으니 신입생 때는 좀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나 이미 배운 거라 부담 없이 쉽게 학점을 챙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얄팍한 기초 수준의 프랑스어를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주 깔끔하게 프랑스어를 머릿속에서 삭제해 버렸다.


프랑스어를 손절한 이유는 명확했다. 개발자가 된 내게 이 언어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해외 영업 직군처럼 프랑스어권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것도 아니고, 출장을 갈 일도 없었다. 설령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진정한 글로벌 언어인 잉글리쉬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어는 너무 괴랄했다! 발음은 예측 불가능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문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이상한 특수 영문자까지 난립하여 그냥 총체적 난국이었다. 원어민이거나 어릴 때 프랑스 학교를 다녔거나 대학에서 전공하여 유학까지 다녀오지 않는 한, 이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 계산만 해봐도 영어를 배우는 데 투자해야 하는 시간보다 최소 2~3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프랑스어는 나에게 그냥 시험을 위한 언어였을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쓸 일도, 배울 일도 없는 프랑스어를 내 인생에서 깔끔하게 떠나보냈다. 안녕, 프랑스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


프랑스어의 그림자.jpg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약 10년이 지나, 나는 뜻밖에도 해외 취업에 도전하게 되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도전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덜컥 캐나다와 영국 두 곳에서 최종 합격을 받아 버렸다. 고민 끝에 캐나다로 가기로 결정했고, 2개월 반의 짧은 준비를 거쳐 드디어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또 다시 나에게는 프랑스어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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