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기 집의 '물맛' 을 품고 살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의 물은 언제나 '끓인 물'이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차를 바꾸셨다. 보리의 고소함, 결명자의 맑음, 옥수수의 달큰함, 배도라지의 은은함, 가끔은 인삼의 씁쓸한 기운까지. 나는 그런 물이 세상의 물맛인 줄 알고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처음 마신 스텐컵의 맹물은 입술을 스치는 순간 금속 냄새가 먼저 올라와 차갑고 서늘하게 다가왔다.
그 낯섦은 지금도 또렷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정수기 물은 쉽게 내 입맛에 들지 않았다. 대학도, 회사도, 어디서든 맹물이 당연한 시대였지만 나는 늘 그 앞에서 조금 늦게 적응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 집 물은 항상 향을 품고 있었을까. 왜 나는 대부분이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맹물 앞에서 혼자 낯섦을 느꼈을까.
보리, 결명자, 옥수수 향들은 오랜 시간 내 몸속에 스며 있었고, 입덧하던 시절에 그 기억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맹물은 이유 없이 역한 냄새가 치고 올라와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들었는데, 엄마의 보리차만은 그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묘하게 편안히 넘어갔다. 몸이 먼저 알아본 맛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가 나를 키우던 읍 단위 동네에는 수도 시설이 있었지만 정수기보다 수돗물을 끓여 마시는 게 자연스러운 때였다. 산 너머 할머니댁은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지하수를 길어다 쓰는 집이었다. 그 물들은 흙과 바람과 계절이 스치는 맛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 자기 집의 '물맛'을 품고 살았다.
어른이 된 지금, 할머니가 평생 지내신 그 시골로 다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사는 부모님 곁에 가보면 그곳은 여전히 지하수를 쓰고 엄마는 여전히 물을 끓인다. 그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한 세대가 오래도록 지켜온 삶의 리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