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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그은 선을 아이는 넘는다

"달 빛과 검은 색 꽃"

by 하루다독

문화센터 미술 수업 시간.

아이는 구긴 호일에 물감을 묻혀

보름달 밑그림 위에 무늬를 찍고 있었다.


강사님은 미리 준비해온 예시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자유롭게 무늬를 표현해보세요."


아이는 둥근 달 안에 콕콕콕 무늬를 찍다가,

어느 순간 달의 바깥까지 손을 뻗었다.

나는 무심코 말했다.

"선 안에 무늬를 넣어야지."


그때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달은 달빛이 있어.

난 달빛도 비추는 걸 표현한 거야."


순간, 눈앞의 그림이 달라보였다.

아이가 그린 달은 선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부드럽게 번진 빛은 종이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


아이는 이미 선 너머를 그리고 있었다.


며칠 전 민화 병풍 만들기 시간도 그랬다.

스텐실 기법으로 꽃 모양을 찍어내는 미술 놀이였다. 아이는 주저 없이 검은색 물감을 집어 들고 꽃 그림 위를 톡톡톡 찍었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검은색 꽃이라니, 어쩐지 이상한데.'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검은색 말고 다른 색은 어때?"


아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꽃은 검은색 꽃이야, 엄마."


나는 그제야 가만히 물러섰다.

그리고 아이의 손끝을 따라

완성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짙은 회색빛으로 번진 꽃은,

의외로 깊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불편했던 건 아이의 그림이 아니라,

내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 이었다는 걸.

그 선은 나의 기준이었고, 나의 익숙함이었다.


아이의 세계엔 그런 선이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손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그릴 뿐이다.


나는 그 순간이 조금 부끄럽고,

아주 많이 고마웠다.


아이 덕분에,

는 선 너머의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아이와그림 #성장일기 #어른의 선 #고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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