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는 도시를 노래하게 한다

2장 : 그는 말했다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포위되는 거야

by 양율




누가 비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으레 싫다고 한다. 기운이 맑고 떳떳하지 못하고 궁벽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그리 둘러댄다.


허나 기실 내 마음은 비 소식을 기쁘게 반긴다.


얼마 전 취해 택시를 타 반포대교를 건넜다. 비가 내렸다. 졸린 눈으로 반쯤 시트에 누워 간만에 서울의 야경을 감상했다. 창문 너머 동공을 굴려 비를 바라봤다.


타닥타닥 창문에 물이 맺힌다.


당신은 비를 거부할 수 있나. 비는 평등하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천만의 시민이 차별 없이 비를 겪는다. 너의 특별한 꿈도, 번쩍이는 얼굴도 빗줄기 앞에선 무용하다. 눈앞에 세계 공용어가 내린다. 매일 밤의 잠처럼. 태풍처럼 지진처럼, 날치기로 통과된 다수당의 법령처럼. 빛깔은 엄격히 단속된다.


빗줄기는 사람들 시야에 그림을 전시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거대한 박람회에 초대된 것이다. 우린 비슷한 액자를 보고 있을 것이다.


너도 비를 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공통점이 하나 늘어 좋다. 더욱이 폭우가 온다면 너의 밝음이 수채화 붓 끝처럼 흐트러진다. 결국에 너와 내가 같아지도록 영혼의 테두리가 문질러진다. 어떤 음악도 잘 어울릴 것이다. 밥 딜런은 살아 생전 <비는 도시를 노래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운전하면서 가장 근사해질 때는 자유로를 지나 강변북로에 들어설 때다. 특히 비가 올 때면 야경이 더 아름답다. 여의도 광경과 밤섬, 한강이 하늘에서 터진 물줄기 공세를 버티며 빛난다. 그때도 우린 같은 수채화를 보았을 것이다.


홍콩에서 야경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새벽에 호텔에서 깼는데 창밖으로 비 내리는 빅토리아 항이 보였다. 빌딩 숲 가운데 바다 수면 위로 수억 개의 파문이 투둑투둑 일어났다.


대도시의 밤은 10대 시절 순진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꿈보다 더 꿈같던 비였다. 홍콩의 야경을 자근자근 편집한 몽상인은 어떤 어벌 큰 꿈을 꿨을까.


생각해보면 방콕에서도, 파리에서도, 이태리에서도 비 오는 장면들만 기억에 남았다. 왜 비 오는 야경은 이토록 아름다운 걸까.


어쩌면 밝음을 좋아하지 않은 탓이겠다. 난 세상 속 밝고 환한 것보다 내 속 조그만 회색과 더 친밀하다.


어쩌면 비는 나에게도 내리지만 너에게도 내리는 탓이겠다. 비를 비롯해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이에 세상이 좁아진다. 해가 밝으면 넓어지고.


난 작은 세상이 좋다. 우리가 속이지도, 멀어지지도 않아도 되는 그 정도 알뜰한 정서의 세계. 작아진 서울은 큰 서울보다 긴밀하다. 먼 우리 곧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 밤 네게서 정다운 말이 온다면 비가 오는 탓이겠다.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