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 된장 끓이기

3장 : 날씨라는 거대한 교감

by 양율




맹탕 같은 된장찌개에 욕심이 날 때가 있다. 욕심껏 소금으로 레프트 훅, 후추로 어퍼컷을 날리고 MSG 스트레이트 한 방으로 기어이 링 위에서 KO 시켜버린다.


어우 짜. 찌푸린 미간을 하며 억지로 참는 네가 있다. 너도 같이 KO 당해 아스스 쓰러진다.


요리를 할 때 찬사를 듣는 때는 언제나 내 의욕보다 간을 덜 할 때다. 완벽한 야끼소바는 김치찌개는, 맛의 밀도가 오밀조밀 모여 있을 때 보단 맛의 화려한 네온사인에서 몇 미터의 여유가 있을 때였다. 맛과 향의 진용에 포위시키기보단, 진국 같은 사람 소개시킬 때처럼 허허실실 내어놓을 때가 딱 좋다.


사람들이 <어이 너 된장. 오늘 내가 초면인데 말이야 내가 한 번 더 먹어도 되겠니> 라며 음식에 낯가리지 않고 희롱할 수 있을 정도로 간은 약간 덜 하면 좋다. 타이트한 음식은 장벽이 높다. 너무 충만하면 멀어지고 싶달까. 그래서 파인다이닝은 조그만 접시를 내오는지도 모른다. 먹는 당신 기죽지 말라고.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정서의 밀도가 높아지면 어느 순간 독자는 힘들어 지친다. 이미 많이 지쳐있었잖는가. 꽉 찬 마음에 아귀아귀 별난 문장을 넣어주면 곧 KO 당해 쓰러질 게 뻔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는 주는 사람이고 동시에 험하게 유별난 사람인 것 같다.


기질이 달뜬 탓이다.


옷매무새도 취향도 아웃사이더 마냥 정일하지 못한 것이 고초다. 내 유별함은 평범이란 감옥에서 탈옥한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다. 내 취향은 일종의 도망자인데, 모름지기 남과 다른 멋이 퍽 좋다. 음식의 간에도 황금 포인트 적중을 노려 새삼스런 것을 시도한다. 점잖지 못한 욕심이다. 내 불온한 마음자리는 불가능을 몽상한다.


허나 사람 마음 나와 같나. 모난 돌 정 맞는 법이다. 일단 살아남아 보기로 하자. 결심의 순간 우악스런 이성이 내 꿈을 집도한다. 메스. 수백만 평의 광활한 시는 5평짜리 현실로 끌려가겠지.


예전 철학전공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다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서양은 시간 축 위에서 선배들의 이론을 반역한 역사요, 동양은 전통을 답습한 세계관이라고. 사회심리학 교재에서는 서양은 개인주의요 동양은 집단주의적 성향이라 가르친다.


이 시대에 개성이 추존된들 소수자들은 눈초리 받기 마련이다. 나야말로 유별날 텐데, 강파른 마음에서 눈치보기가 영 바쁘다.


동양은 과도한 것에 대해 긴급 구속한다. 너 이거 맞아? 너 문제 많아. 알아?


네. 소금은 한소끔만, 후추는 두 바퀴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내 양심이 아니었다면 난 영원한 아웃사이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부모에게, 동양에게 상속받기로 합의한 정체성이 빙의하니 기괴한 피카소의 그림이다. 정제와 유별남의 소동이 큰일이다.


난 최적의 간을 맞추고 싶지만 욕심일까. 치밀하게도 아름답게 보이고 싶지만 그것 또한 불화일까. 너에게 내 피땀을 다해 넉넉히 따스하고 싶지만 그것도 부담일까.


친구들은 말했다. 아, 안 돼. 그건 안 돼. 난 속으로 재채기한다. 알아 알아, 나도 알아. 내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뜨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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