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3장 : 날씨라는 거대한 교감

by 양율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이라면 응당 화가 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던가, 사랑하는 이가 낯선 이로부터 곤란한 일에 빠져있다던가. 연인에게 배신당한다던가.


그럴 땐 별안간 붉은 사이렌이 돌아간다. 마음의 방에 비상벨이 울린다.


<대피하세요. 경고합니다. 대피하세요.>


별안간 가슴속에 요만했던 씨앗이 뜨거운 행성처럼 커져 폭발할 것 같다. 머리에 다이너마이트 심지가 타고 있는 느낌. 바시랑거리는 손 끝 온도가 화씨 몇 백도는 쉬이 치솟는다. 혈관 속 적혈구들 얼굴로 솟구쳐 귀가 코가 빨개진다.


사이렌 소리가 커진다. 고막을 막는 주변의 친구에게 말한다. 야, 죽기 싫으면 도망가. 피해반경이 몇 백 미터는 될 테니까. 난 적도 아군도 없어. 난 이성이란 단어를 몰라. 침착해? 늦었어. 이미 폭발 카운트다운 중이야. 3, 2...


그 격정적이고 준열한 파도에 몸이 흔들린다. 분노는 무류히 내 심장을 압수한다. 내 이성은 처참한 구치소에 재갈이 물리고 수갑이 채워져 있다. 분노 정권이 스르르 퇴진하고 눈을 뜨고 보면 기억이 없다.


성마른 분노의 잔해는 상스러워 부끄럽다.

어릴 적엔 분노가 많았다. 사소한 빛깔에도 눈부셨던 만큼 악은 유난히 짙어 보였고, 보잇한 미움색에도 난 절절맸다. 인생은 춤이라던데, 난 시시한 리듬에도 맵싹히 춤을 췄나 보다.


허나,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격분을 느끼는 일이 없어진다. 체념이라는 국경이 늘어간다.


어깨를 쳐도, 욕지기를 들어도, 누군가 날 배반해도, 내 속에 법이 크다. 아무 말이나 해봐. 테스트해 보는 것도 좋아.


예전의 내 방어기제의 출동 대원이 최첨단 장비로 엘리트급 소방대원들이었다면, 지금 나는 대체로 은퇴한 이후의 시니어 인력들로 모여진 노회한 구급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이 하는 것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폭탄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속 엉킨 회로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에그. 추워서 얼었네. 쉬다 가소. 누었다 가소. 뜨거운 차 한잔해. 몸 녹여가오. 에이 아저씨 어디가? 여기 있으라니깐.

어찌 된 일일까.


나이가 들수록 경계의 팽팽함이 느슨해진다. 꽤나 분노해 본 일 탓 일게다.


최근에 한번 사려 없는 친구에게 화난 적이 있었다. 비상벨이 울리던 차에 구급단이 파견됐다. 또 겨울이네. 당신. 그런데 예언 한번 합세. 분노가 썰물 되면 이성의 구원군이 다시 인질을 구하러 올 거요. 당신은 해방될 거요. 그럼 주민등록증에 찍힌 당신으로 돌아올 거요. 가족관계증명서의 아들로 돌아올 거요. 등기부등본의 명백한 당신으로.


이제 미움받는 사태로는 감정은 방정히 질서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당최 결코 해방되지 않은 내가 있다.

구속됨이 밉지는 않지만 오래가는 분노가 있다. 세상과 인생에 만연한 부조리들에 대한 자기 연민이다. 어떤 이는 이를 냉소라 하고 어떤 이는 우울이라 한다.


하지만 하얀 눈밭에서 걸어가고 결국 뒤를 돌아보면 작아지는 검은 점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화는 가볍지만 삶 속 오래가는 분노요, 어둠 속에서 잠복근무 중인 곱디고운 냉소다.


생은 거칠어 난 그런 잡균조차 모조리 멸균하는 차가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난 예측 불가능한 멜로디 위에 어그적거리는 리듬으로 울다 웃으며 춤추며 즐거워하면서도 티 안나는 화를 내며 사는 중이다.


분노가 없어진 자리에 냉소라니 그것도 서글프지만, 그것보다 애석한 것은 급한 분노와 낫낫한 냉기 모두 사실은 순수와 닮아 있다는 것을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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