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날씨라는 거대한 교감
업무차 알게 된 직원 중 하나가 한 밴드의 콘서트 장에 꽤 열심히 다니는 걸 알게 된 후 난 조금 놀랐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기가 그 밴드의 콘서트 장을 얼마나 많이 다녀왔는지 신나는 듯이 말했다. 장황했던 말을 요약하자면 그녀는 그 밴드의 팬이었다.
팬이 된다는 건 본디 대단한 열성이 필요한 일이다. 몇 년이나 꺼지지 않는 불씨, 횃불에 옮겨 붙고 촛불에 양여하여 세월 따라 이어지는 영원한 추앙의 심정이 아닌가.
업무상 관계는 본질적으로 사무적이고 차갑기 마련인데 이 일을 알고 나서는 그와 업무를 할 때 그가 속으론 가슴 뜨끈한 사람임에 안도하게 된다.
내가 놀란 것은 그것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자니 난 누군가의 팬이 돼본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에 몰두한 적은 있다. 범박하게 난 요리팬이다라고는 말할 순 있다. 음악팬, 문학팬, 헬스팬, 음주팬, 산책팬 등 억지로 팬심을 붙여보자면 끝이 없다. 허나 대체로 그런 건 진정한 팬덤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날 소개할 때 "아 놀라시겠지만, 전 사실 식사의 팬입니다." 라거나 "전 산소 호흡의 팬입니다. 완전 중독적이죠. 그거 없인 못 살아요." 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날 어디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유명 작가가 마라톤을 좋아한다거나, 어떤 작곡가를 광적으로 집착한다거나 하는 일에 동경심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인가의 팬이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한 번은 와인에 빠져보기로 했다. 와인 모임도 다녔다. 나름 공부도 했다. 딸보나 로쉴드 같은 값비싼 와인도 마셔봤다. 그런데 몇 개월 뒤 난 여전히 와인바 대신 소주집에서 약속을 잡는다. 한동안은 아일레이산 위스키를 좋아해 아드벡만 마시기도 했다. 그것도 한동안이었다. 그 이후에도 난 공항 면세점에서 위스키나 와인 코너 앞에서 무심히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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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유명한 이들을 좋아해 보자. 난 록밴드 오아시스도 좋아하고 화가 모네도 좋아하지만 팬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 한들, 아 정말요. 그렇군요. 라는 생각으로 조금 들뜰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을 훑어보자니, 딱히 내가 타겟으로 해 팬심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난 놀랄 만치 빠른 속도로 흥미를 잃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팬심이 없다면 지금의 대중문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비틀즈, 마이클 잭슨은 물론이요, 현재의 K-POP도 아무리 실력과 외모가 출중한들 팬덤의 무한한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결실을 맺지 못했을 일이다. 반대로 상상해서, 누군가 내게 양율씨의 팬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정말 하늘을 날아다닐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들은 연예인에, 작가에, 영화배우, 스포츠맨들에 빠져 애정 생활에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런 취미 없는 나는 어쩐지 소외받는 느낌이라 외로운 마음조차 든다. 나는 팬심에 대해서는 박자도, 음정도 모르는 팬치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난 기본적으로 애정이 조금 드문 사람일까. 어쩌면 열정을 믿지 않는 냉소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최첨단 감지센서가 있어 온도가 뜨겁게 오르면 자동 냉각 질소가스가 살포되는 장치가 설치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사병이 들라 치면 머리를 리셋시키는 칩셋이 뇌 안에 박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의 팬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되돌려 받을 수 없이 하염없이 사랑을 주는 것. 대답 없는 응원을 소리치고 모호한 실존적 동반자로 기꺼이 날 기부한다는 것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는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려동물을 대하는 주인의 마음, 또는 난초 꽃 피우려는 심정과 닮아 있을까.
내가 몇 년간 공들여 글을 썼을 때 초고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열광적으로 읽고 싶어 하는 바람에 객쩍은 기분으로 제본을 떠 그들에게 소포로 보내주었다. 하루가 지났을까, 이틀이 지났을까. 내 마음은 두방망이질 쳤다. 왜 답이 없을까. 내 글이 재미가 없나, 감동이 없을까, 형편없게 보는 건 아닐까.
걱정에 사무쳐 잠을 못 이루다 못 이겨 베개를 두들겨 팼다. 시간이 지나자 난 심지어 그들을 싫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백하자면 그때 피드백을 주지 않은 몇 명과는 인연을 끊음을 결심하기도 했다). 난 노심초사했다. 내가 낳은 아기를 홀로 맡겨놓고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아기가 잘 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춥진 않는지. 내 품에서 떠나간 원고가 나에겐 그랬다.
성숙한 팬이라면 아티스트가 편히 쉬고, 자유로운 권리를 누릴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 나는 새벽마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무대에서 속옷을 던지며 스캔들 상대에게 면도날을 보내는 극성팬과 마찬가지였다. 난 내 소설의 악랄한 팬이 되어 버린 것이다.
팬심에 문외한인 날 변명해 보자면 난 애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서 빚은 것을 극성으로 열애하는 편인가 보다.
난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사랑할 수 없다.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짝사랑에 매몰될 날 상상할 수 없다. 내게 잠시 머무는 건 세차게 지나가는 열차 엔진의 소각될 뜨거움일 뿐이다.
굳이 먼발치에서 사랑을 대접하는 건 내 본성과는 안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로 좋지 않은가. 사랑은 반드시 가까이 있을 테다.
너와 내가 끌어안고 매만지고 쓰다듬으며 절실히 대화하는 사랑. 너와 내가 하나로 용융해 울고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사랑. 그게 내 팬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