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소리가 싫다

3장 : 날씨라는 거대한 교감

by 양율



아침의 알람 소리가 싫다.


하여 내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으로 알람음을 바꿨다. 그랬더니 이젠 그 음악이 싫어졌다. 전 애인과 같이 들은 음악이 나올 때 추억에 잠기곤 한다면 그 노래를 알람 소리로 둬 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알람 소리는 침대를 벗어나라는 명령이요, 내가 미처 감당되지 않는 밤사이 꿈을 당장 정리하라는 혹독한 잔소리처럼 들려 영 마뜩잖다. 나도 본디 질서 없는 사람은 아닌데도, 날 새벽과 이별하라, 커튼 열라, 세상 마중하라 떠밀고 재촉하는 알람이 모자 쓴 독한 조교 같아 얄밉다.


상심한 날엔 더욱 그렇다.


안락한 밤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는데 알람은 내 서글픈 마음 따윈 아랑 곳 없이 날 일어나라 지시하는 것이 영 차갑게 느껴져 서운한 것이다. 한 번씩은 <어젯밤은 잘 잤어? 오늘도 힘들겠지만 하나 둘 기지개 켜보자.> 라는 식으로 말하는 알람이 있다면 마음이 가 알래스카라도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낮에 일하고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편이다. 쉴 시간이 다소 부족한 나다.


푹 자고 일어나 알람조차 필요 없는 이들을 보면 부럽고도 신기한 마음이 든다. 그건 복을 타고 나는 일일 것이겠지만, 난 본디 일복이 많아 여러모로 고생을 자처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완전히 휴식으로 점유할 수 있는 새벽을 즐기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다.


하여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일이 빈번해 알람은 필수로 몇 번 체크해 두고 자는데, 알람을 내 손으로 성실히 지정해 두곤 아침이 되면 도리어 알람소리에 화딱지를 내다니 어쩌면 난 다중인격이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난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지하철이든 버스든 도로든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아침잠으로 피곤한 얼굴을 보노라면 난 일종의 동료 의식 같은 것을 느껴 힘을 낸다. 어쩌면 이 세계는 알람으로 인해 움직이는 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사랑도 하고 꿈같은 것도 가질 것이다.


동료 중 한 명이 학원에서 피아노 연습을 한다고 알려왔다. 그래서 어떻게 돼 가냐 했더니 학원에서 연주회를 여는데 참여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직 서툴러 거절했다고 했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남에게 보여주자니 그것 또한 성미가 가신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유희가 대외 성과의 영역으로 발령 나면 어쩌면 쉽게 의욕을 잃고 마는 것이다.


난 의욕과 애증의 관계다.


의욕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멋진 옷과 맛있는 밥을 꿈꾸게 한다. 한편 의욕은 미래를 옥죄고 누군가와 비교해 나를 쓰러트리고 내게 머리 위에 별이 있다 없다 늘 의심케 한다. 날 잡으려 뒤에서 몽둥이 들고 쫓아오는 괴한이다.


의욕은 사람에게 타고난 선물이지만 그 누구보다 장렬히 우릴 지치게 하는 두 머리의 짐승이다.


하여 매일 아침 의욕하라, 욕망하라 떠미는 알람이 익숙해 일어나지만 5일을 내리 욕망하는 것에 탈진해 우리는 짧은 주말을 사랑한다.


평일에,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럴 땐 억지로 기운 차리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의 생산보다 중요한 일은 오래 마음이 가는 일이다. 희망하는 것도 일이 되면 더는 희망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꿈이 야근이 되면 언젠간 꿈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게 강한 질서로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닌 건 분명하다. 세계의 경제 방정식에서 작은 변수로 이탈하고 싶을 땐 작은 마이너스가 되어도 좋겠다. 대신 여러 들판 쏘다니고 손맛 좋은 음식 먹고 다정한 말들 들으며 살아보아도 되겠다. 정당한 내 몫의 햇빛을 받아 붉은색 꽃으로 차오르는 내가 있겠다. 그럼 내 마이너스가 좀 더 근사해진 부호가 되어 돌아와 있겠다.


넉넉한 사랑은 우리를 일주일에 5일은 희망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내일도 알람을 믿어야 한다. 알람은 언제라도 우릴 일으켜줄 것이므로.


내일 까만 새벽, 내가 한때 좋아했던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눈을 뜨겠지. 괜스레 투덜거리나 해보며 커튼을 다시 열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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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