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 자해 행동에서 벗어나기
케케묵고 낡아버린 감정에는 물리적 무게가 생겼다. 물 먹은 가쓰오부시처럼 무겁고 눅눅해졌다. 병원 진료는 예약 날이 지나버린 지 한참이다. 나아야 한다는 의지도 없다. 왜 나아져야 해? 그냥 죽으면 되잖아.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면서 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좀 멍청한 것 같아.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자살을 한 사람들은 죽음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거야. 여러 선택지 중에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콕 집어 고른 게 아니야. 그들은 그저 운이 좋아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이고 나는 운이 나빠 살아있는 거야.
고통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던가. 어디가 아프면 치료를 받고 점점 나아지기 마련인데 이 병은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제자리라는 게 더 미치게 만든다.
우울증 환자는 입김에 학종이 뒤집어지듯이 하루에 수십 번도 상태가 바뀌어댄다.
낮에는 좋았다가도 해가 지면 해가 져서 죽고 싶어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왜 아직 살아있지?라는 의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돈도 없는데 물티슈는 왜 이렇게 빨리 떨어지는 건지. 물티슈가 없으니 죽어야지. 모든 것들이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되어 돌아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 미친년이니까 빨리 도망치라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날 떠나지 않을 거라는 뻔한 정답을 듣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자기 살을 찢거나 불태우는 일인데도 주드는 그게 마치 심각한 두통이 있을 때 찾아 먹는 진통제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까요.
자해로 갈급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주드에게 있어 자해는 말 그대로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 잔뜩 지쳤을 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거나 몹시 굶주린 상태에서 음식을 먹는 일처럼, 쌓인 육체적 욕구를 푸는 행위로 보인다.
스스로의 몸을 해치면서 그런 감각을 얻다니.
자신에게 있어 자해는 불안을 잠재우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금속이 피부를 뚫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을 즐겼"으며, "한 줄 한 줄 면도날을 그을 때마다 화가 누그러졌고, 방 안의 색깔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라고 고백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리듬이 나를 깨끗하게 헹구어낼수록 나 자신을 점점 더 또렷하게 의식하게"되는 이 경험이 몹시 익숙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좀 더 나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자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부상을 입히는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곤두서 있는 신경을 가라앉히는 self-soothing행위 일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불행한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병자의 침상 곁에 서 있는 건강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환자에게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대부분의 정신과 약물치료는 최소 2주~6개월 이상 복용해야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건 상처에 딱지 생기 듯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어서, 실제로 호전되고 있는 상태여도 금방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러다 자의적으로 치료를 중단해 버린다.
혹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데? 싶으면 그때부터 병원을 안 가기 시작한다.
나는 일주일 약값 만원이 없어서 안 가게 됐다.
정신과 치료 중 가장 위험한 게 치료 자의중단이다.
어쩌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자의중단을 하게 되면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악화되는 경우가 흔하고 나빠지는 데에는 하루하루 가속이 붙는다.
이런 일은 옆에서 챙겨주는 보호자가 없을 때 더 쉽게 일어났다.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고, 내가 나를 놓으려는 순간에 붙들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악화된다는 걸 검색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나빠질게 뭐가 더 있냐는 심정이었다. 안되면 죽지 뭐. 병원을 안 가게 된 뒤로 자해행동이 심해졌다. 마약이나 담배를 해본 적은 없지만 자해는 마치 마약 같았다. 3일에 한 번 자해를 하면 3일 굶다가 끼니를 먹은 것 같이 무언가가 해소됐다. 습관이 되니 심심하면 자해 충동이 들었고 자살에 대한 두려움이 무뎌졌다.
아, 담배를 끊는 사람은 없고 평생 참는 사람만 있다는 말이 이거구나.
왜 마약 사범의 재범률이 높은지 체감해 버렸다.
내가 살아있음이 진절머리 나게 끔찍해지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충동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기분이랄까.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고통에서 날 꺼내려면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폭발하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운동도 수면제도 소용없었고 자해를 해야만 했다.
내가 나를 고립시키는 것도 자해였고, 며칠 내내 굶거나 폭식을 하는 것도 자해였다.
나는 불행해야 마땅한 사람이었기에 내 불행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자해를 했고, 내가 손절하는 건지 손절당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관계들로 인해 자해를 했다.
외부로부터 아주 약한 자극만 받아도 나는 크게 상처가 났다.
응급실에서 왜 자해를 했는지 물어볼 때마다 모르겠다고 답했다.
살기 싫은데 죽기도 싫어서
죽고 싶은데 죽기 싫어서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죽고 싶어서 하는 자해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하는 자해를 비자살성 자해라고 일컫는다.
오히려 정말 죽기로 결심하고 자살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때는 자해를 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통을 주면서도 나는 늘 내게 실망하고 또 자책했다.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네.
너무 성급하게 일상생활을 기대했나?
주변 사람들이 아직도 안 나았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다시는 자해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해도 왜 나는 이렇게 되는 걸까? 내가 너무 나약한 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자해를 안 해야 치료에 성공한 걸까.
이러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면 어떡하지.
죽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아지고 있는 건가?
완전히 자해를 하지 않게 되는 상태가 되어야 나아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그냥 환상 또는 이상일뿐이다.
증상이 없는 상태를 점이라고 친다면 회복은 점이 아니라 선이나 구간이라고 한다.
이상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내가 편하다. 그러면 나아지고 있는 건지 의심하는 일도 더 이상 없다.
대교에서 신고받고 경찰차와 구급차가 왔었는데 그때는 왜 죽겠다는 사람을 마음대로 살리는 거냐고 생각했다. 응급실비를 못 내서 고생을 한번 해보니 그 뒤로는 병원비 생각해서 자해를 잘 안 하게 됐다.
자해를 줄이게 된 큰 계기는 응급실에서 내 손목을 이어주신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다.
"최대한 예쁘게 하려고는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흉은 지겠어요."
이미 나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다 놔버렸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를 이렇게 붙들어주는 걸까.
나 조차도 나를 포기한 순간 마지막에 나를 살려줄 사람은 의료진이 아닐까.
아마 그때부터 진짜 치료가 시작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