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현은 텃밭을 가꾸며 구슬땀을 흘렸다.
70대인 그녀는 귀농한 지 4년쯤 되었고, 과거 대형 it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팀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그녀는 평생 모은 은퇴 자금으로 한적한 시골에 내려와 작물과 닭, 염소들을 돌보며 소소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또한 은퇴해, 귀농생활을 함께 즐기고 있었다.
남편은 공직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정년퇴직을 한 뒤였다.
이제 눈치를 볼 직장 상사나 동료도 없었지만, 그들은 일이 몸에 배어 가만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어느 날 미현은 딸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엄마. 이번에 남편이 해외 출장을 2주 정도 갔다 오는데, 나도 이번에 지방에서 최소 7일은 나가 있어야 될 거 같아. 바다 좀 봐줄 수 있어?”
“며칠부터 며칠까지라고? 응 데리고 와라. 이럴 때 할머니 노릇해야지.”
***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방학 숙제는 미루지 마.”
“네. 엄마.”
자기 딸에게 뽀뽀한 후 엄마, 아빠와 포옹하고 그녀는 차를 타고 사라졌다.
미현은 손녀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기 위해 부엌을 향했고, 할아버지는 손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가 주었다.
손녀와 시냇물에 도착해 시간을 보내다가 미현에게 저녁이 다 됐으니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3명의 가족은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을 보냈다.
***
이튿날부터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손녀딸은 밖에 나가지 못해 잠시 우울해했지만, 아이패드를 주자 금세 실내 생활에 적응했다.
노부부도 야외 활동을 하지 못해 약간 좀이 쑤셨지만, 책을 보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티비도 보며 나름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다음 날 새벽쯤에 결국 그쳤다.
부부는 밀려있는 일거리와 그걸 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부부는 잠들어 있는 손녀딸을 방에 두고, 각자의 일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텃밭을 재정비하고, 축사를 청소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1시간쯤 지났을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잠들어있는 손녀딸을 확인하고, 거실 테이블에서 잠시 티타임을 가졌다.
그러고는 오전 낮잠을 청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우지끈하는 굉음과 함께 토사가 창문과 벽을 허물며 밀려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지옥에 떨어진 듯했다.
미현의 남편은 먼저 손녀딸의 방으로 달려 나갔다.
손녀를 안고 남편이 나오는데 집의 바닥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남편은 균형을 잃었고, 손녀를 감싼 채 굴러떨어져 바닥처럼 밑에 내려온 벽과 부딪쳤다.
남편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손녀딸은 기절한 듯 보였다.
그때 더욱 많은 양의 토사가 집안으로 밀려왔고, 그녀는 손녀딸을 안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처음 이곳을 구경하고, 드디어 좋은 자리를 찾았다며 설레던 그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남편을 두고 온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밖은 강물이 범람해 그녀의 허리춤까지 올라와 있었다.
물살이 세서 한 걸음씩 옮기는 게 발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높은 지역을 향해 올라갈 결심을 했다.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가장 가까운 길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 물이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았다.
허리에 있던 물이 가슴 바로 아래까지 차 있음을 느꼈다.
점점 숨이 가빠오고, 손녀를 높이 드느라 팔이 아파졌다.
그때 누군가 멀리서 튜브를 타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튜브를 탄 처음 본 남자에게 미현은 소리쳤다.
“저기 선생님. 저희도 튜브에 태워주세요!”
“아, 이게 튜브가 바람이 약해요. 한 명 겨우 떠 있어서 죄송합니다.”
“저희 손녀딸만이라도 받아주세요. 부탁합니다.”
“아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
40년 전의 일이다.
그녀의 한때 직장 상사는 전세금 사기를 당한 미현에게 2천만 원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와이프의 혈액암으로 인해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고도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미현을 찾아갔다.
“미현씨. 우리 와이프가 아파서 치료비가 많이 드네. 빌려준 2천만 원 좀 받을 수 있을까?”
“과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 집을 빼면 짐을 둘 곳도 없고요. 3년 안에만 갚으라고 하셨잖아요. 아직 10개월 정도 남았는데, 그때 계약도 끝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을게요. 제가 기도드리겠습니다!”
***
미현은 탁한 흙탕물 속에서 위를 바라본다.
손녀에게 작디작은 나뭇가지를 묶었지만 역시나 가라앉고 있는 듯하다.
물이 갑자기 맑아지고 물 위의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튜브를 탄 처음 본 남자가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