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꽃, 사유
"부러우면 지는 거야."
요즘에도 이 말을 자주 쓰는지는 모르겠다. 이 말이 유행할 때도 지금도 나는 자주 부럽고 자주 진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는 크게 부러움이 없는 나는 주로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공부 잘하는 자식도, 넓은 집, 좋은 차도, 물려줄 재산이 많은 부모도 딱히 부럽지 않은데 무동력으로 여행하는 사람, 여성 중장기 기사는 부럽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가진 유형의 요소보다 삶의 태도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질투는 하지 않는다. 막연한 동경에는 질투가 없다.
막연한 동경이 아닌 진짜 부러울 때도 부럽다는 감정은 쉽게 인정한다. 그건 지는 게 아니다. 진짜 지는 건 부러우면서도 부럽지 않다고 우길 때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면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상대가 내 눈에 잘나 보이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잘나 보이거나 잘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 그럴 때는 그냥 꼴 보기 싫다고 하면 된다. 상대에게? 아니, 혼잣말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솔직히 부러움을 인정하는 거다. 부러움의 감정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남이 가졌을 때 부러워하는 건 당연하다.
몇 해 전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고 한동안 질투의 감정에 시달린 적이 있다. 지금도 간혹 시달린다.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왜 이렇게나 많은지,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것이 작가들이 글을 잘 쓸 때와는 다른 차원으로 다가왔다. 기성 작가는 작가니까 질투도 언감생심이지만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다 생각한 사람들이 잘 쓰는 글은 왜 그렇게 샘이 나던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인 적도 있다. 여러 분 있지만 누구인지는 배 아파서 밝히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많이 찍지만 좋은 사진에 질투해 본 적은 없다. 감탄만 한다. 이것으로 내가 사랑하는 건 사진이 아니고 사진에 담기는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휴대전화 카메라로 만족하고 충분히 보고 나면 삭제한다.
질투는 욕망을 들여다보기 참 좋은 감정이다. 나는 질투를 욕망으로 가는 직선거리로 인식한다. 감정이 그렇듯 욕망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다른 차원이듯 욕망을 아는 것과 욕망을 실현하는 것도 다른 차원이다. 실현해야 할 욕망과 자제해야 할 욕망을 나누기 이전에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잘 쓰고 싶음을 욕망한다. 그 이후에 대한 욕망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오락가락한다. 작가가 되고 싶다가도 된다 해도 쓸데없는 일 같고, 나의 한계와 어쩌지 못하는 내 안의 근원적인 공허가 있어 허무는 계속 따라다닐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쓰기'의 욕망에 집중한다. 그런데 욕망은 질투와 친하고, 그 질투란 놈은 성가시다. 뒤척이게 한다.
남이 글을 잘 쓴다고 하여 또 다 부러워 뒤척이지도 않는다. 뒤척이게 되는 사람의 글은 뒤척이고 나서야 알았다. 그의 글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일 때에야 감정이 널뛴다는 것을. 이때는 부러우면 지는 게 맞다. 그냥 질 수는 없다. 이제 나와의 대결이 남는다. 부러움의 상대는 있을 수 있어도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그와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스스로 원하는 더 좋은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뭐 말이 쉽지 이게 쉬운가. 더구나 나의 경우 욕망과 열정이 비례하지도 않더라. 그러니 부디 글 잘 쓰는 이를 더는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를 한다.
"어이 자네, 요리조리 쏙쏙 미꾸라지 심보 말고 더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하란 말이야!"
"에고고, 누가 그걸 몰라. 다만, 어렵다고!"
내면의 모노드라마는 언제쯤 끝이 나려는지, 어질어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