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부르는 소리
햇빛이 거실을 향해 환하게 내려쬐고 있습니다. 어느덧 화창해진 날씨가 봄을 알리는 듯합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햇살을 보니 좋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봄은 가만히 나를 부르며 "뭐 하니"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그 부름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봄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곁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봄만은 여전히 따뜻하게 내 곁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과 나누지는 못했지만, 봄이 가져다준 따뜻함은 그대로 내 안에 머물렀습니다.
3월은 나에게 늘 새로운 출발점처럼 느껴집니다. 봄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가볍게 설렙니다.
책상에 앉아 밖을 내다봤습니다. 창문 밖에는 어딜 가는지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 사람들 속에 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는 나를 점점 잊혀 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 시간 속 어디에도 내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간 안에 있고 싶습니다.
거실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렸습니다.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세대 간 소음, 화장실과 베란다에서 흡연 자제, 그리고 서로 조금씩 양보해 달라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나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아래층에 피해를 주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음도 듣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듯이, 삶도 모두에게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내게는 멈춘 듯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시간이 매일 내게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25분입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집중하지 못한 채 읽어버린 시간이 많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일상임에도 마음이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꽃이 피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이 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와 빨래 건조대에 옷이 다 말랐는지 확인했습니다. 마른 옷을 거두면서 창밖 햇살이 얼굴에 와닿는 따스함을 가만히 느꼈습니다.
지난 1년, 그리고 다시 시작된 1년은 아버지와의 이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분히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아는 것보다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소리는 여론 조사 기관의 설문 전화였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상한 음식을 꺼내 음식물 봉투에 담았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아껴두셨던 음식을 상한 줄도 모르고 가져가서 먹으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가져온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그릇만 깨끗이 설거지한 뒤, 버리곤 했습니다. 버리려는 음식을 바라보니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니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보이고, 햇빛이 따사롭게 비쳐와 기분이 좋았습니다. 햇살이 반가워서 그런지 몸은 한결 홀가분해졌습니다.
음식을 버린 뒤 편의점에 들러 과자를 사고 나왔습니다. 길 옆에서 한 아이가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습니다.
귀엽게 생긴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편의점을 가리키며 "사줘요. 먹고 싶어요." 외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 행동에 묘한 행복이 느껴졌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씩 웃었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엄마 역시 아이와 실랑이를 하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오래전 아내와 자식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가 그립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물을 마셨습니다. 거실에서 TV를 켜고 사 온 과자를 바라보니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예쁜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늙어 간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어 웃음이 납니다. 어린아이가 더 좋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봄의 햇살은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반갑게, 그리고 그리움까지 함께 데리고 옵니다. 자식은 나를 잘 찾지 않지만, 나는 보고 싶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이제 없습니다.